칸트의 실천철학
인간이 무리지어 살기 시작한 이래로 줄곧 도덕이라는 것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서, 특히 서양의 역사에서 도덕과 관련하여 첫 번째로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된 사건은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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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출생 - 사망 1724.4.23. ~ 1804.2.13.
인간이 무리지어 살기 시작한 이래로 줄곧 도덕이라는 것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서, 특히 서양의 역사에서 도덕과 관련하여 첫 번째로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된 사건은 기독교의 등장이다. 예수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2000년 전,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유명한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설교를 한다. 그 설교는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예수의 설교는 우리가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를 천국의 보상과 지옥의 형벌로 설명한다. 예컨대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를 용서하는 것 등의 도덕적 행위를 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천국의 보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고, 형제를 저주하고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부도덕한 행위를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그럴 경우 지옥의 형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로부터 1800년 동안, 많은 화가와 소설가들은 지옥이라는 영원한 형벌과 천국이라는 영원한 축복을 묘사하며 대중에게 도덕적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쳤다.
계몽주의 시대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
계몽주의 시대가 최고조에 이른 18세기, 세속에 대한 기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제 도덕성에 대한 새로운 설명이 필요하게 되었다. 계몽시대란 이성의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서 절대자인 신에 의존하지 않는 도덕성에 대한 설명, 천국과 지옥을 끌어들이지 않고 인간 이성에만 기대어 도덕성을 설명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러한 역할을 감당해 낸 계몽 철학자, 그가 바로 칸트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이 학문적 지식을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가를 밝힘으로써 자연에 관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의 한계를 밝히고자 했다. 그러나 칸트의 인간에 대한 탐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연에 관한 탐구를 넘어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탐구가 철학의 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보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순수이성의 한계를 넘어선다고 선언한 신의 존재 문제, 인간의 자율성 문제는 순수이성의 한계 밖에 있지만 여전히 중요한 철학적 과제이고, 이를 해명하는 것이 바로 실천이성의 역할인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1781년 [순수이성비판]을 발표하고, 그로부터 실천이성의 문제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1785년 [도덕 형이상학의 정초], 1788년 [실천이성비판], 1797년 [도덕 형이상학]을 잇달아 출간한다.
칸트가 도덕철학에 관심을 기울이던 이 무렵, 서양의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하나 발발한다. 다름 아닌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다. 프랑스 대혁명은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근대 시민 사회의 출발이 된 사건이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절대주의의 황제를 시민들이 무너뜨린 것이다. 그들이 기치로 내세운 것은 자유, 평등, 박애였다. 그 중에서 자유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세기 계몽주의의 중심이 되는 가치 중 하나가 바로 자유였고, 프랑스 대혁명에 의해서 보편적 가치가 된 자유야말로 칸트의 도덕철학의 토대이자 핵심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두 가지 세계
존재의 세계와 당위의 세계
칸트에게는 두 개의 세계가 있다. 하나는 존재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당위의 세계이다. 존재의 세계는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이므로 그 세계에 대한 인식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일 수 있고, 따라서 그 세계는 우리의 순수이성의 인식 대상으로 과학의 세계이다. 반면에 당위의 세계는 ‘있어야 할 세계’, 즉 도덕의 세계, 가치의 세계이다. 인간이 초월적인 존재가 아닌 한 존재의 세계에 속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적 존재자로서 인간은 실천적인 도덕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즉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 갈 뿐인 비이성적인 존재자와 달리 인간은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의지적으로 행위하면서 살아간다. 인간은 자신 속에서 도덕적 의지와 추구하는 바, 목적으로 구성된 또 하나의 이성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이성을 칸트는 실천이성이라고 명명한다.
[실천이성비판]은 실천이성으로서 작용하는 인간의 도덕적 의지를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순수이성이 존재 세계를 탐구하는 역할을 한다면, 실천이성은 있어야 할 당위의 세계에 대해 탐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렇다고 칸트가 인간이 두 개의 별도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이성이란 궁극적으로 하나이고 동일한 것인데, 그것의 적용에서만 구별된다고 말한다. 즉 하나의 이성이 두 가지 방식으로 대상과 관계하고, 그 대상이 갖는 특성으로 해서 이성은 다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성의 사변적 사용의 관심은 최고의 선험적 원리에 이르는 객관의 인식에 있고, 실천적 사용의 관심은 궁극적인 완전한 목적과 관련하여 의지를 규정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존재의 세계는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반면, 당위의 세계는 도덕적 선택의 세계이고, 따라서 자유의 법칙이 통용되는 세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대상을 탐구하는 자연학과 구별하여 도덕철학은 의지의 법칙, 또는 자유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먼저 인간 의지의 자유를 확증한다. 이를 토대로 형식적 도덕법칙으로서 정언명령을 확립하고, 이어서 도덕적 의지의 전체적 대상을 규정하는 작업, 즉 행위의 결과로 실현되어야 할 목적을 제시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인간은 비이성적인 존재와 달리 어떤 행위를 하기에 앞서, 그 행위가 옳은가를 생각하고 선택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도덕법칙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실천적 법칙으로서 도덕법칙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도덕법칙은 주관적인 실천 원리인 준칙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도덕법칙은 보편타당한 법칙이므로 모든 경험적 요소가 제거된 선천적 원리이어야 한다. 우리는 욕구가 충족되면 쾌락을 느끼고 행복해 한다. 그러나 쾌락이나 행복은 경험적인 것이다. 어떤 대상이 쾌락을 주는가, 고통을 주는가는 결코 선천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대상을 도덕법칙의 규정근거로 삼으려는 시도는 선천적인 법칙을 부여하는 데 성공할 수 없다. 결국 모든 경험적 요소가 배제된 선천적 원리로서 도덕법칙에는 보편적 입법의 단순한 형식만 남게 될 것이다. 칸트는 도덕법칙이 이렇게 형식상으로만 의지를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규정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의지는 자유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지가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대상에 의해서 규정된다면, 그 대상은 존재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필연적인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겠지만, 우리의 의지를 규정하는 것에는 어떤 질료적 대상도 포함되어 있지 않고 따라서 자연법칙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칸트는 도덕법칙이 존재한다는 부인할 수 없는 믿음으로부터 의지의 자유를 설명하고, 그런 의미에서 도덕법칙은 의지의 자유의 인식근거라고 말한다. 또 칸트는 의지의 자유가 없다면 도덕법칙은 성립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의지의 자유는 도덕법칙의 존재근거라고 말한다. 즉 도덕법칙이 있다는 일반적인 믿음이 있기에 의지의 자유를 깨달을 수 있고, 의지의 자유가 있기에 도덕법칙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제한 없이 섢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뿐
칸트의 윤리학을 흔히 의무론이라고 한다. 의지란 이성에 따라 행위를 결정하는 능력, 곧 실천이성이다. 그리고 선의지1)(good will)란 이성의 가르침에 따라 옳은 행위를, 그 결과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 없이 그 행위가 옳다는 이유만으로 행하려는 의지이다. 다시 말해서 행위의 결과에 대한 고려나 자연적 성향과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도덕법칙을 준수하는 것을 의무로 받아들이고 의무를 다하려는 의지가 바로 선의지이다. 칸트는 [도덕형이상학의 정초]의 서두에서 “세상 안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 밖에서조차 제한 없이 선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뿐”이라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선의지에 따른 행위만이 유일하게 선한 행위이라는 뜻이다. 어떤 행위가 우연히 의무와 일치할지라도 그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의무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한 행위가 아니라면, 그것은 적절한 행위라고는 할 수 있어도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칸트의 의무에 대한 강조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의무여! 너 숭고하고 위대한 이름이여, 너는 사람들이 좋아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되 복종을 요구하는구나.”라는 의무예찬에서도 알 수 있다.
어떤 행위가 도덕적으로 선한 것인가, 아닌가의 기준이 그 행위의 동기가 선의지에 따른 것이냐 아니냐에 달려있을 뿐, 그 행위의 결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의 도덕 이론을 동기론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나중에 다루어지겠지만 행위의 도덕성의 기준을 그 행위의 결과에서 찾는 공리주의와 같은 결과주의 도덕 이론도 있다. 그러나 칸트는 행위의 결과는 그 행위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실천이성비판]의 핵심적인 문제는 인간이 세운 주관적인 도덕법칙이 어떻게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있는가이다. 그런 의미에서 객관적인 도덕법칙과 개개인의 준칙은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는 객관적인 도덕법칙과 양립하기 어려운 준칙에 따라 행위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주관적인 준칙을 행위의 기준으로 삼기도 하기 때문에, 도덕법칙은 강제(의무)의 형식을 띤 명령으로 주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도덕법칙으로 주어지는 명령은 선택적이거나 조건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칸트의 도덕법칙이 정언명령으로 나타나는 이유이다. “노년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젊어서 근면하게 살아라.”와 같은 조건적 명령은 올바르고 중요한 도덕적 가르침일 수 있지만, 노년의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이 가르침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또 도덕법칙이 “정직하거나, 부모를 공경하라.”와 같은 선택적인 명령으로 주어진다면, 그 명령 중 하나는 따르지 않아도 무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조건적 명령이나 선택적 명령은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질 수 없다. 이렇게 선택적인 명령이나 조건적인 명령은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질 수 없고 오직 정언명령2)만이 보편성과 필연성을 갖기 때문에, 칸트는 도덕법칙이 정언명령으로 주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도덕법칙이 정언명령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있다. 도덕법칙은 어떤 행위가 바람직한 목적의 수단이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선한 것이기에 그 행위를 명령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도덕법칙은 보편성과 타당성을 가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정언명령에서의 행위는 어떤 목적을 지시하지 않고서도, 즉 어떤 다른 목적이 없이도, 그 자체가 객관적으로, 필연적으로 수행된다. 정언명령은 필연적인 실천적 원칙으로서 타당하다”고 말한다.
도덕법칙으로서의 정언명령
보편적인 도덕적 법칙
이제 칸트가 말하는 도덕법칙으로서 정언명령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정언명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우리의 주관적인 행위의 원칙인 준칙이 보편적 법칙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행위가 보편적인 도덕법칙을 따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정언명령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있는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 하라.”는 것이다. 대단히 유명한 구절이므로 다시 한 번 칸트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보자.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네 의지를 통해서 보편적 자연법칙이 될 수 있는 것처럼 행위하라.” 어려운 개념이 사용되어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하다. 어떤 행위가 도덕적인가 아닌가의 기준은, 그 행위의 기준이 언제 어디에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즉 내가 지금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의 판단 기준은, 내가 다른 사람이 같은 상황에서 그 행위를 하는 것을 옳다고 판단할 수 있다면 그 행위는 보편적인 도덕적 법칙에 따른 것이고, 따라서 옳은 행위이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를 하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통찰이 필요하지 않다. 단순히 네가 행위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그 기준이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있는지만 물으면 된다. 만약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부정적이라면 그 준칙을 버리고, 답이 ‘그렇다’라면 그 준칙에 따라 행위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준칙을 따르거나 포기해야 하는 이유는 그 준칙에 따를 경우 다른 사람과 나에게 이익이 되거나 해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있거나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실천이성은 우리에게 보편적인 ‘법칙주기’에 직접적인 존경심을 가지라고 명령하고 있다는 것이 칸트의 정언명령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의 도덕철학을 법칙주의(deontologism)라고 하기도 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존재의 세계가 인간 사유의 보편적인 형식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인식주체로서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위치시킨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인간 이성에 대한 또 다른 성찰을 제시한다. 인간은 도덕적 의도와 목적으로 구성된 또 하나의 이성 체계를 가지고 있고, 이를 통해서 인간은 자연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이 세계에 부여하는 목적은 존재 세계를 넘어서는 것이며, 성취되어야 할 무엇이다. 그리고 인간의 도덕적 의지와 목적을 존재의 세계에 실현함으로써 세계를 변혁시키는 힘은 바로 실천이성으로 작용하는 인간 의지의 힘이다. 이러한 도덕법칙을 깨닫고 그 가치를 존중할 줄 아는 인간의 가치를 그는 [실천이성비판]의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의 마음을 채우고, 내가 그것에 대해 더 자주, 더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늘 새로운 경외심과 존경심을 더해 주는 것 두 가지가 있다. 머리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 그리고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 도덕법칙을 지닌 인간을 별이 빛나는 하늘에 비유하면서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존중했던 칸트, 그는 노년에 시력과 기억력을 잃어가면서 쓸쓸한 날을 보내다, “좋군!(Es ist gut!)”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죽었다. 그의 묘비에는 앞에서 인용한 구절의 끝 부분, “머리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이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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