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 Wolfgang Amadeus Mozart ]
모차르트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잘츠부르크 교회당의 부악장이며, 궁정 전속 작곡자였다. 모차르트의 부친 레오폴트는 일곱 명의 아이를 두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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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잘츠부르크 교회당의 부악장이며, 궁정 전속 작곡자였다. 모차르트의 부친 레오폴트는 일곱 명의 아이를 두었으나, 자란 것은 겨우 모차르트와 누나 마리아 안나(1751-1829) 뿐이었다. 모차르트가 3세 때 누나 마리아 안나가 클라비어를 배우고 있는데, 모차르트는 그 옆에서 가만히 그것을 듣고 있었다. 이윽고 누나의 레슨이 끝나자 서슴지 않고 클라비어 앞에 앉더니 단풍나무잎 같은 손으로 누나가 배우고 있던 곡을 치기 시작했다. 광경을 보고 있던 선생은 몹시 놀라고 말았다. 누나보다 잘 칠 뿐만 아니라 그것에 완전한 화성이 붙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는 5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클라비어를 배웠고, 이듬해에는 클라비어 소곡을 작곡했다. 천재가 나타났다는 소식은 쉽게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퍼지고,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모차르트 남매를 데리고 뮌헨 · 빈 · 프레스부르크로 다니면서 이 천재를 선보였다. 7세 때 미뉴에트와 트리오(1761-62)(K. 1), 미뉴에트(1762)(K. 2 · 4 · 5) 등을 출판했고, 파리 연주여행을 가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루이 15세 앞에서 천재의 묘기를 발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파리에 5개월간 체재하면서 열광적 환영을 받은 뒤 런던에 건너가 1년 이상 머물렀는데, 모차르트의 신동(神童)다운 솜씨는 런던의 인기를 한 몸에 모을 정도였다.
1772년에 모차르트 부자는 이탈리아 각지에 커다란 감명을 주었으며, 또한 모차르트 자신도 파드레 마르티니에게 사사하여 작곡 등을 공부할 수 있었다. 17세에서 18세 사이의 모차르트는 짧은 여행 외에는 조용히 공부했다. 그의 작곡상의 진보는 뚜렷해서, 18세 때에는 이미 출판된 것이 200곡에 달했다고 한다.
성년이 된 모차르트에게 냉엄한 현실의 거친 물결이 다가왔다. 과거 총애를 받았던 오스트리아의 황제는 사망하고, 또 특히 보살핌을 받았던 황후도 퇴위했다. 13세의 모차르트를 관현악장으로 임명하였던 잘츠부르크의 대사교(大司敎)도 세상을 떠났고, 바뀐 대사교는 웬일인지 모차르트에게 냉담했다. 그리고 성년인 모차르트의 눈에 비친 것은 너무도 낮은 음악가의 위치였다. 21세의 모차르트가 장기 연주 여행 허가를 대사교에게 간청하여 한마디로 부결되었을 때, 모차르트의 불만은 일시에 폭발하여 마침내 대사교에게 사직원을 제출하는 불행이 있었다.
모차르트는 교회라는 당시의 커다란 비호자(庇護者)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므로, 곧 그날부터 생활을 걱정해야만 했다. 작곡과 연주, 이 두 가지가 유일한 수입의 길이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향했고, 모차르트가 베버 일가와 알게 된 것은 이 여행 때였다. 모차르트는 베버 가문의 큰딸 알로이지아와 사랑에 빠졌는데, 파리로부터의 귀로에 베버 가정을 방문하였으나 알로이지아의 마음은 변해 있었고, 실연한 모차르트의 눈에 비친 것은 알로이지아의 여동생 콘스탄체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1779년, 파리에서 만하임 · 뮌헨을 거쳐 잘츠부르크에 돌아온 모차르트는 이듬해 1780년부터 잘츠부르크에 있으면서 작곡에 전념했다.
「이도메네오」는 이듬해 1월 29일에 뮌헨에서 초연되었다. 모차르트는 빈에 자리를 잡고 필사적으로 연주와 작곡에 힘썼으나, 생활은 고달프기만 했다. 26세 때인 1782년 8월 4일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했는데, 이 콘스탄체는 경제 관념이 희박하여 가계(家計)는 한층 어려워졌다. 모차르트가 하이든을 만난 것은 1781년이었는데 하이든은 모차르트를 위대한 작곡가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1785년에 작곡에 착수한 「피가로의 결혼」은 이듬해 5월 1일에 초연되었으며, 이 해에 모차르트는 아버지를 잃었다. 「프라하」라고 이름 붙여진 교향곡도 같은 해에 프라하를 방문하여 초연되었는데,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극적인 대면은 이 해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베토벤을 만나서도 매정했으며, 베토벤은 이와 같은 모차르트에게 몹시 실망했던 것 같다. 1788년은 모차르트의 창작열이 폭발한 해였다. 최대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3개의 교향곡(E♭장조 · g단조 · C장조 「주피터」)이 놀랄 만큼 짧은 시일에 작곡되었고, 피아노 협주곡 D장조 「대관식」도 만들어졌다.
모차르트의 명성은 드디어 높아졌으나, 빈곤은 그의 생활을 점점 더 괴롭혔다. 수레를 끄는 노새처럼 일했으나 대가로 받는 것은 적었고, 빈의 왕후 귀족은 모차르트의 음악에 만족했지만 모차르트에게 물질적인 원조를 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1790년 「코시 판 투테」가 상연되었으며, 이 해에 거행된 오스트리아의 대관식에서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대관식」이 모차르트 자신의 손으로 연주되었다. 1791년, 모차르트가 35세가 되던 해에 가극 「마적(魔笛)」을 작곡하고 있었을 때 몹시 건강을 해쳤던 것 같다. 그 병고와 경제적인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터에 「레퀴엠」의 작곡을 의뢰하는 사자(使者)가 찾아왔다. 가엾은 모차르트는 그를 ‘죽음의 사자’라 여기면서 슬퍼하며 작곡에 착수했는데, 이것이 완성되지 않은 채 당시 빈에 유행한 악성 장티푸스에 걸렸고, 마침내 그는 1791년 12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빈의 관리는 전염을 두려워하여 급히 모차르트의 유해를 공동묘지에 매장해 버렸다. 모차르트의 죽음을 알게 된 사람들과 아내 콘스탄체가 달려왔을 때에는 이미 모차르트의 매장은 끝났고, 매장된 정확한 장소조차 알 수 없는 형편이었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영화 아마데우스로 읽는 음악사 :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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