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 Pyotr Ilich Tchaikovsky ]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보트킨스크(Votkinsk)에서 5월 7일 태어났다. 이 해에 프랑스에서는 문호 졸라와 인상주의 화가 모네가 태어났다. 광산 기사인 아버지는 음악 애호가이고, 어머니도 취미로 피아노를 치는 미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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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사망 | 1840년 ~ 1893년 |
| 국적 | 러시아 |
| 주요작품 | 교향곡 제4번 f단조 Op.36 교향곡 제5번 e단조 Op.64 교향곡 제6번 b단조 비창 교향곡 만프레드 Op.58 발레 모음곡 백조의 호수 발레 모음곡 잠자는 숲속의 미녀 Op.66 발레 모음곡 호두까기 인형 Op.71 환상적 서곡 로메오와 줄리에트 슬라브 행진곡 환상적 교향시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Op.32 이탈리아 기상곡 세레나데 Op.48 대서곡 1812년 Op.49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플랫단조(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현악 4중주곡 제1번 D장조 Op.11 피아노 3중주곡 a단조(실내악곡) Op.50 무언가 F장조 Op.2의 3 사계 Op.37 슬픈 노래 Op.40의 2 멜로디 Op.42의 3 우울한 세레나데 Op.26 로코코풍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33 다만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Op.6의 6 예브게니 오네긴 |
보트킨스크(Votkinsk)에서 5월 7일 태어났다. 이 해에 프랑스에서는 문호 졸라와 인상주의 화가 모네가 태어났다. 광산 기사인 아버지는 음악 애호가이고, 어머니도 취미로 피아노를 치는 미성의 소유자였다. 표트르는 어려서부터 음악의 재능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문학적 감수성도 강해서 일곱 살의 나이로 벌써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고 한다. 1848년부터는 양친과 함께 페테르스부르크로 이주하고,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워 이듬해에는 작곡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관청 근무에서 음악 학생으로
그러나 양친은 그를 음악가로서 세상에 내보내겠다는 확신도 없어서 1850년에는 법률학교에 입학시켰다. 재학중 피아노와 음악 이론을 배웠으나 1859년(19세) 졸업 후에는 법무성에 근무하고, 관리 생활과 음악에의 정열의 모순에 고민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마침 1860년에 안톤 루빈스타인(Anton Rubinstein, 1829~1894)이 페테르스부르크에 음악 교실을 개설하여 이듬해 차이콥스키(러시아)는 자렘바(Zaremba) 교수에게 이론을 배웠다.
1862년(22세) 이 교실이 러시아 최초의 음악원으로 승격된 기회에 그대로 음악원 학생이 되면서 이듬해에는 법무성을 그만두고 음악에 전념케 되었다. 이 음악원에서는 독일음악에 뿌리를 박은 유럽의 전통 음악에 의거한 교육이 실시되고 있었는데, 그의 최초의 관현악곡 「폭풍우」(1864)나 졸업 작품 「환희에의 송가」(1865)는 바그너(독일)나 '5인조'의 음악과 가까운 작풍이었기 때문에 루빈스타인으로부터 나쁜 평을 들었다.
국민주의와의 교류
1866년 안톤 루빈스타인의 동생 니콜라이 루빈스타인(Nikolai Rubinstein, 1835~1881)이 설립한 모스크바 음악 교실의 강사로 초빙되어 부임하였다. 모스크바에서의 첫작품으로 「교향곡 제1번」을 썼는데 2년 후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지휘에 의해 초연되었다. 이 작품은 국민주의적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었으며, 이것을 계기로 해서 발라키레프를 알고 다시 '5인조'의 음악가와도 친교를 맺었다. 발라키레프의 민요 연구는 차이콥스키(러시아)에게 커다란 자극이 되었고 '5인조'도 또한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이 무렵의 작품은 민요적인 수법을 사용한 「현악 4중주곡(실내악곡) 제1번」(1871), 「교향곡 제2번」(1872), 셰익스피어에게 영감을 얻은 환상적 서곡 「로메오와 줄리에트」(관현악곡)(1869), 환상곡 「템페스트」(독주곡)(1873) 등이 있는데 이와 함께 그의 이름은 국외에도 알려졌다.
그리고 유럽음악의 기법을 충분히 구사하여 독자적인 러시아 예술을 창조하려는 차이콥스키(러시아)는 이윽고 '5인조'의 사상과도 대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더라도 「피아노 협주곡 제1번」(1874)은 진경을 나타낸 명작으로, 한스 폰 뷜로에 의한 보스턴 초연은 차이콥스키(러시아)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넓혔다. 이어지는 발레 「백조의 호수」(관현악곡)와 「슬라브 행진곡」(관현악곡)(모두 1876)도 같은 목표로의 발전을 나타내는 걸작이지만, 수확이 많았던 모스크바 시대도 의외의 결말을 고하게 된다.
불행한 결혼
1877년(37세) 차이콥스키(러시아)는 음악원의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Antonina Milyukova)의 구혼을 받고 7월에 결혼했다. 그러나 그의 음악에 아무런 이해도 못하는 신부는 단지 무거운 짐이 될 뿐이었다. 내성적인 차이콥스키(러시아)는 이것을 고민하다가 심한 신경병에 걸려 결국에는 투신 자살까지 꾀한 두 달만에 결혼 생활은 깨어지고, 그는 단신으로 페테르스부르크로 가버렸다. 그 후 스위스에 가서 요양을 계속하는 동안 폰 메크(Nadezhde von Meck) 부인과 편지 왕래를 시작하고, 부인의 도움으로 차이콥스키(러시아)의 생활은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메크 부인의 원조
모스크바 시대의 그는 주 30시간의 강의와 박봉에 허덕이고 있었다. 철도 경영자의 미망인 메크 부인은 이전부터 그의 음악에 경의를 갖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1년에 6000루블의 원조를 제의했다. 이 연금은 그 후 13년간 계속되지만, 두 사람은 단 한 번의 우연한 해후 외에는 편지만으로 교제할 뿐이었다. 아무튼 이 제의에 용기를 얻은 차이콥스키(러시아)는 교직을 떠나 오로지 창작에 몰두, 메크 부인에게 바친 「교향곡 제4번(교향곡)」(1877)을 비롯한 새로운 창작기에 들어갔다.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오페라)과 「바이올린 협주곡」(모두 1878)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명작이다. 이동안에 외국 여행도 종종 시도했으며, 「이탈리아 카프리치오」(1880)는 이러한 여행의 산물의 하나였다.
충실한 장년기와 갑작스런 죽음
1885년(45세)부터는 또다시 모스크바에 돌아가 가장 충실한 활동기에 접어든다. 「만프레드」(교향곡)교향곡(1885)을 이 시기의 필두로 「교향곡 제5번」(1888),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관현악곡)(1889),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1890)이 잇따라 완성되어 가는데, 1886년 이후는 지휘자로서의 연주 활동도 전개되고, 유럽 각지로의 연주 여행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높아지는 명성에 반해 차이콥스키(러시아)의 건강은 과로 때문에 악화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위에 1891년(51세)에 메크 부인의 원조가 끝난 사실은 이미 정부의 연금을 받는 몸이긴 했지만 역시 커다란 타격이었다.
발레 「호두까기 인형」(1892) 완성 후에는 「교향곡 제6번」(1893)의 완성에 힘쓰고 1893년 자신의 지휘로 초연했다. 초연 뒤 동생 모데스트와 상의하여 이 작품을 「비창」이라 하였는데, 그로부터 8일이 지난 11월 6일 콜레라로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모스크바 악파의 원조
차이콥스키(러시아)의 독자성은 러시아 음악을 유럽의 전통음악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면서 민족적 예술 음악을 창조한 점에 있다. 그 때문에 무소륵스키(러시아) 등의 국민 음악파와 대립한 모스크바 악파의 원조인데, 오늘날에는 두 사람 모두 러시아 국민 음악을 발전시킨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다방면에 걸친 작품 중에서는 교향곡이 가장 중요한 부문으로 보로딘(러시아)과 나란히 러시아 교향곡사(史)의 주류를 형성함과 동시에, 극적인 악상의 전개는 베토벤(독일)의 교향곡 사상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의미의 통속성과 예술성을 갖춘 그의 음악은 가장 널리 애호되는 클래식 음악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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