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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의학⦁약학⦁식품영양학/식품영양학

제3절 인류역사와 함께 한 음식재료의 이해

by 별꽃74 2025. 9. 24.

글로벌시대의 음식과 문화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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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인류역사와 함께 한 음식재료의 이해
  1. 먹거리의 근원을 이룬 향기와 맛
  2. 인간생명의 풍성함을 이룬 양식


1. 먹거리의 근원을 이룬 향기와 맛

1) 소금

소금은 인간, 아니 모든 동물의 체액에 존재하여 삼투압 유지로 생명유지에 필수불가결하다. 인체는 0.7%의 식염(Nacl)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이 땀과 소변으로 배출되므로 성인이 하루 평균 10~15g의 소금을 섭취하지 않으면 탈수증으로 죽는다. 지구상의 생물은 자신의 모체인 바다에서 탄생했다. 원시시대 유목민은 육식동물을 잡아먹음으로써 그 동물의 체내에 있는 염분을 섭취할 수 있었으나 농경생활이 시작되어 농작물을 양식으로 하게 되자 생리적 요구를 충족할 만큼 소금 섭취가 어려워졌다.

소금이 산출되는 해안이나 호수, 암염이 있는 장소는 교역의 중심이 되었다. 독일의 할슈타트(Hallstatt)의 Halle, 영국의 드로이트워치(Droitwich)나 낸트워치(Nantwich)의 wich, 미국의 솔트 레이크 시티(Salt Lake City)와 오스트리아의 짤츠부르크(Salzburg)의 salt라는 말은 소금을 만드는 집(소금물을 끓이는 집)의 의미다.

이들 이름이 있는 지역은 소금을 만들거나 소금을 교역하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소금은 음식물의 부패를 방지하고,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유지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어, 청정(淸淨)의 상징으로 신성시한다. 그리스도의 산상설교에서 정의와 진리를 위해 박해받는 사람을 “땅의 소금”으로 불렀다.

로마의 티베르강 하류의 오스티아에 제염소가 있어 소금을 로마로 운반하던 이 길을 로마인들은 소금길(비아 살라리아)로 부른다. 해상도시 베네치아도 해안에서 산출되는 소금을 비잔틴제국과 동방제국에 판매해 동방의 산물을 유럽에 팔아 번성하였다. 봉급(샐러리, Salary)은 소금이 교역의 매개로 화폐의 역할을 하므로 관리와 군인들의 급료는 ‘살라리움(Salarium, 소금의 라틴어)’으로 지급되었다.

소금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정부가 소금을 전매(專賣)하거나 소금에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1930년 영국이 제염금지령(製鹽禁止令)을 내리고 인도인에게 영국의 소금을 구입하도록 강제조처를 했다. 이에 대항해 간디는 해안까지 360km나 되는 길을 직접 소금을 만드는 일에 나서게 됨으로써 무저항운동을 시작했다. 이 여행 도중 많은 민중이 참가하게 되고, 이들은 단디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가마솥에 소금물을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이 “소금행진”은 침체한 인도 민중의 눈을 뜨게 한다.

소금은 주로 식용이나 식육 저장용 외에도 공업용 용도로 확산되었다. 염료, 화약, 합성고무, 비누, 각종 화공약품 등의 화학공업, 피혁공업(가죽 무두질), 요업(자기, 도기 등의 유약), 광업(은, 구리 등의 제련), 제동(製銅 : 구리의 담금질), 특히 소다공업의 각종 제품은 화학공업의 기초로 소금을 전기분해하여 가성소다와 염소를 만들고, 소금에 암모니아와 탄산가스를 불어넣어 소다석회와 화학비료인 유안(硫安)을 만든다. 의식주생활에 불가결한 화학섬유, 유리, 비누, 세제, 염화비닐, 기타 석유화학 제품과 글루타민산 소다 등의 조미료는 모두 소금을 원료로 한 소다와 염소를 사용해서 만든 것이다.

2) 설탕

설탕은 식물의 수액, 과일, 꽃, 씨앗, 뿌리, 잎 등 모든 곳에 함유되어 있다. 인류가 식물에서 설탕을 추출해 내는 방법을 알지 못했을 때, 꿀벌이 식물에 함유되어 있는 설탕을 흡수해 모아 주었다. 감자당(甘蔗糖), 첨채당(甛菜糖; 사탕무우당), 야자당(椰子糖), 단풍나무당, 옥수수당 등이 있다. 이 중 사탕나무로 만드는 감자당과 사탕무우(Beet)로 만드는 첨채당의 생산량이 압도적으로 많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사탕수수는 B.C. 2000년경 인도 뱅갈지방에서 지중해 각국, 동남아시아, 중국, 페르시아, 북아프리카, 스페인으로 다시 1492년 컬럼버스에 의해 기후가 온화하고 강우량이 풍부한 카리브해에서 대량으로 재배했다. 스페인 사람들의 가혹한 통치로 인디오가 전멸하면서 이로 인한 설탕생산의 차질은, 아프리카의 노예사냥과 노예무역이 시작되어 설탕(백색화물)과 노예(흑색화물)의 교역량이 급증했다. 유럽에서는 17세기 무렵부터 홍차, 커피, 초콜릿 음료가 유행하고, 설탕의 수요도 급증해 설탕생산은 카리브해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에 여왕의 지원을 받은 드레이크 같은 해적이 멕시코에서 스페인으로 향하는 “은선단(銀船團)”을 습격한다. 1588년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해 카리브해와 대서양의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영국은 스페인을 대신해 카리브해로 침입해 설탕생산과 노예무역을 주도해 홍차를 마시는 풍습의 성행으로 설탕은 영국 최대의 수입품이 되었다.

자메이카를 중심으로 하는 영국의 설탕농장은 연간 35%에 이르는 높은 이윤으로 부를 축적하였고, 총, 화약, 술 등을 가득 실은 영국선박은 리버풀을 출항하여 서아프리카로 갔고, 대량의 흑인노예를 서인도제도로 실어 날랐다. 그곳에서는 설탕을 싣고 리버풀로 돌아오는데, 이런 백색과 흑색의 삼각무역은 19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는데, 이것이 산업혁명에 필요한 자본이 되었고, 영국 근대국가의 기틀이 되었다.

806년 나폴레옹은 영국을 경제적으로 압박하려고 대륙봉쇄령(베를린 칙령)을 선포하면서, 서인도산 감자당 수입이 중지되고, 유럽은 설탕부족과 가격폭등으로 고통받다가, 1801년 독일의 화학자가 사탕무우 뿌리에서 설탕추출에 성공한다. 1890년경 함당률(含糖率)이 14%로 감자당과 대등해지면서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은 전세계 설탕의 1/3의 양을 생산하였다.

세계적인 설탕국인 쿠바는 1890년대에 생산량의 3/4을 미국으로 수출했고, 일상용품의 대부분은 미국으로부터 수입했다. 그러자 미국의 설탕자본가들은 쿠바에 대한 간섭을 정부에 요구했다. 1898년 4월, 미국 전함 메인호가 하바나항에서 격침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미국 정부는 스페인의 소행으로 보고 전쟁을 일으켰다.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쾀섬 등을 영유하게 되었고, 쿠바를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런 식의 미국의 내정간섭은 쿠바뿐만 아니라 중남미 전체에 대해 행해졌다. 세계대공황 당시 쿠바에서는 설탕 가격하락과 미국의 쿠바산 설탕수입할당량 축소 때문에 미국자본의 대규모 공장은 살아남았지만, 쿠바인이 경영하던 수많은 설탕공장은 파산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쿠바경제의 대미(對美)의존도는 더욱더 심화되어갔다.

대미종속에서 해방을 요구하는 운동이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사탕수수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난 카스트로의 지도로 쿠바혁명(1959년)이 일어났다. 쿠바 혁명정부는 토지개혁과 농업의 다각화, 외국자본의 국유화 등에 주력했으나, 미국의 경제봉쇄 등 방해로 인해 아직도 설탕 중심의 경제체제를 탈피하지 못하고, 필리핀의 네그로스(Negros)섬 주민들은 아직도 만성적인 기아상태이다.인구 210만 가운데 75%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해 설탕섬으로 불린다. 농장은 소수의 대지주가 경영하면서, 1986년 필리핀혁명은 민중운동으로 독재자 마르코스가 추방되고,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에 취임(1986~1992)한다. 그러나 친정인 코판코 가문이 네그로스섬에 6,000ha의 사탕수수 농장을 소유한 대지주였기 때문에, 새 정권 하에서도 토지개혁 등 근본적인 개혁이 단행되지 않았다.

3) 참깨

참깨는 “만능식품” 또는 “먹는 알약”이라고 할 만큼, 양질의 리놀산(酸)이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으며, 단백질, 미네랄, 비타민 등이 풍부한 고영양식품이다. 뛰어난 건강식품인데다 향기가 좋아 예로부터 진귀한 향료였다. <아라비안나이트>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서 “열려라 참깨!”

참깨는 B.C. 2500년경 인더스 문명인 모헨조다르와 하랍파 유적에서 탄화(炭化)된 참깨 씨앗이 다수 출토된 후 인도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래되었다. 16세기 이후, 참깨는 아프리카 노예해안 일대에서 노예와 함께 카리브해 지역으로 퍼졌고, 다시 중남미로 전파되었다. 이런 종류로는 수수, 수박, 광저기(콩과의 식물) 등이 있다. 신대륙에서 아프리카로 전해진 것은 옥수수, 사탕수수, 담배, 땅콩 등이 있다.

참깨가 미국에 전파된 것은 17세기 후반으로, 남부의 면화, 담배 플랜테이션(Plantation; 대농장)에 투입된 아프리카의 흑인노예를 통해서이다. 참깨와 면화가 수확기가 동일해 ‘벌어진 참깨’의 수확기를 놓쳐 확산이 안 되었으나 1946년 ‘닫혀라 참깨’로 개량에 성공한다.

1952년 텍사스 델라스시 남부 100마일 거리의 필리스시의 앤더슨 형제 제임스와 로이는 <참깨산업회사>를 설립해 참깨재배와 참깨에서 각종 제품(참깨, 참깨 크래커, 마가린, 참깨 햄버거 등)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형제는 참깨의 대량생산을 위해, 필리스시의 교외에 땅을 확보하고 대농장과 노동자구역을 만들어 흑인, 멕시코인, 푸에르토리코인 노동자들을 이주시키고, 이 거리를 “참깨거리(Sesame Street)”로 명명하였다.

4) 고추와 마늘

고추의 원산지는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다. 현재 세계의 고추 생산량은 연간 100만 톤 정도인데, 그중 1/4이 인도산이다. 그 외에 말레이시아, 타이, 부탄 등에 사는 아시아계 민족들이 애용하는 편이며, 고추의 원산지인 중남미는 고추 그 자체를 사용하기보다는 중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라여유와 같은 다바스코(고추를 농축한 액체)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음식 중에서 고추를 이용해 가장 맵게 만드는 음식으로는 아구찜, 낙지볶음, 함흥냉면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이 전부 매운맛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경상도 등 남동부지역은 좋아하지만, 북서부지역은 그다지 즐겨하지 않는다.

18세기 전후에 고추가 한국요리에 혁명을 일으켰다. 김치의 산화방부제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오늘날 고추의 사용영역은 더욱 확대되어 고추장을 만드는 주원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나라 음식에서 고추가 빠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음식문화에 뿌리내리고 있다. 마늘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로 알려졌는데, 최근에 마늘에 들어 있는 영양소 및 기능이 우리 현대인에게 필수적이며, 암의 발병을 억제시키는 효능이 있다고 밝혀졌다. 한국인은 어떤 음식도 마늘이 들어가지 않으면, 제 맛을 내지 못할 정도이며, 중국도 마찬가지다.

5) 된장과 간장

술과 된장은 고대 사람들이 미생물을 이용해 만든 최고의 맛을 내는 음식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에서는 된장을 장(醬)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여기서 장이란 콩, 보리, 쌀, 밀가루 등을 발효시켜 만든 조미료이지 된장 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중국은 예로부터 조미료를 총칭해서 장(醬)이라고 불렀다.

야채, 과일로 만든 장, 조개로 만든 장, 각종 짐승들의 고기로 만든 장, 생선으로 만든 장, 이 중에서 고기로 만든 장이 생선장과 함께 오래되었다. 고기장과 생선장의 뒤를 이어 현재 보편화되어 있는 콩장이 나타났고, 한무제 때 콩으로 만든 장이 대성행하여 술 담그기와 더불어 발달했다. 콩을 볶고, 이를 다시 삶은 다음 발효시켜 된장을 만든다는 것으로 장은 향기가 매우 좋다.

간장은 된장을 이용해 만든 또 다른 조미료라 할 수 있다. 송대 간장[醬油]을 두장즙(豆醬汁), 두장청(豆醬淸)으로, 또는 줄여서 장즙(醬汁), 장청(醬淸)으로 불렀다. 이는 간장이 된장으로부터 분리되어 액체의 상태임을 말한다. 과거 일본은 요리문화는 중국처럼 다양하지도, 한국처럼 발효식품이 발달한 것도 아니다. 다만, 회(膾)라는 요리처럼 별다른 조리 없이 자연산 그대로를 즐겨 먹었다. 이처럼 일본의 전통요리는 날것을 그냥 먹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무언가로 간을 맞추거나, 역겨움을 덜어주는 재료가 필요했는데 그 중 간장이 널리 사용되었다.

6) 후추

일반적으로 향신료라고 하는 것은 후추, 계피, 고추냉이 등 음식물에 향기와 맛을 더해주거나 음식물의 부패를 방지하기도 하는 식물성 음식을 말한다. 이러한 향신료는 현대인에게 필수적이며, 근대 이전에는 이것을 구하기 위해 대항해시대가 전개되었고, 식민지 건설 등 인류사의 불행이 전개되었다.
이처럼 인류의 식생활에 큰 변화를 준 향신료는 그 종류도 엄청나게 많아서 동남아지역에서 전통음식을 만들 때, 들어가는 향신료는 20여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향신료 가운데는 특정지역 주민들만이 좋아하는 독특한 맛과 향기를 내는 특이한 것들이 많이 있는가 하면,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에 필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만큼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것도 많다.
향신료는 대체로 아시아의 열대지역에서 나는 식물이기 때문에 이들 지역 이외의 사람들은 일찍이 이것들을 맛볼 수가 없었다. 대항해시대를 통해 유럽인들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면서 이 향신료의 맛을 알게 되어 이것을 유럽에 전했고, 이를 가지고 돈을 벌겠다는 상인들이 동남아시아로 본격 진출하면서, 유럽인들의 대아시아 진출이 시작되었다.
당시 유럽인들의 음식이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정도 밖에 없었고, 이는 고역이었다. 서양 사람들이 즐겨 먹는 육류는 아무리 소금에 절였다해도 부패하기 쉬운데다 그 맛 또한 변질되기 십상이어서 부패를 방지하고 입맛을 돋우는 향신료의 발견은 일대 혁명이었다.
후추의 원명은 Piper nigrum으로서 원산지는 인도이며, 길이가 7~8m에 달하는 상록의 덩굴성 식물이다. 직경 4~5mm의 열매가 사방에 달리는데, 이 작은 과실을 향신료로 이용한다. 후추의 종류에는 검은 후추, 흰 후추가 있다. 검은 후추는 아직 익지 않은 초록색의 과일을 이틀 정도 햇빛에 말린 다음 발로 껍데기를 벗긴 것을 말한다. 이는 매운 맛은 적지만, 향기가 아주 좋다.
흰 후추는 완전히 익은 열매를 냇물에 씻은 뒤 건조시킨 다음 껍질과 살을 벗겨내고 씨앗만을 가지고 만드는데 이것은 매운맛과 독특한 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두 종류 모두 식욕을 돋우고 부패를 방지하며 진통과 해열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유럽인들의 동남아시아 진출은 가장 수익성이 높은 향신료의 교역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향신료의 대량 수확을 위해 식민지 경영과 농장의 설치가 확대되어 갔다. 식민지의 향신료 수확에 발벗고 나섰던 서구 세력들 -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등 - 은 원주민과 전쟁을 하면서 무지막지하게 그들을 희생시키고 탄압했다.
동식물을 조리해서 먹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조리를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요리가 될 수 없다. 하나의 요리는 그만큼 고유한 역사를 함축하고 있고, 많은 연구와 온갖 재료가 동원되어야 비로소 탄생되는 것이다. 이처럼 요리의 발달사를 보면, 각 시기별 · 지역별로 요리가 나름대로 체계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향신료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향신료의 거래가 진행되었던 것이고, 이를 둘러싼 많은 역사적 사건이 생겨났다. 즉 인간의 역사는 향신료에 혼합되어 뒤얽혀진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향신료라고 하는 것은 자연에서 채취하여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그 종류나 생산량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며, 이 물량의 한계성이라는 것이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되었고, 후에는 교역의 활성화를 가져오게 하였던 것이다.
식욕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는 결국 인공적으로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내는 지혜를 짜내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지혜로 만들어낸 인공적인 향신료는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조미료라고 말한다. 조미료의 기원은 일본인들이 만들어냈다고 하는 아지노모도(‘맛의 근원’의 의미인 일본어(日本語))인데 이것은 세계적으로 가장 보편화되어 있다.
인간이 추구하는 기본적인 미각에는 5가지로, 단맛 · 신맛 · 짠맛 · 쓴맛 · 매운맛 등이다. 그리고 이들 맛 외에 다른 맛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 새로운 맛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을 어떤 맛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아마도 우리가 보통 말하는 미원이나 다시마 맛을 의미할 것이다. 이들 조미료 계통의 맛은 사실상 고대에서부터 발견되었으며 대개 동식물의 조직이나 액즙을 혼합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1908년 일본의 화학자 이케다(池田菊苗)가 일본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통 조미료를 분석한 결과 그 주성분인 구르타민산 나트륨이라는 사실을 확인, 이를 이용하여 본격적인 화학조미료를 만들게 되었고, 세계 각국에서는 이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혼합조미료, 가공조미료, 발효조미료 등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제 세계 각지에서는 이렇게 만들어진 조미료에 의해 독특한 맛을 내는 음식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들 조미료는 맛과 색깔, 그리고 향기 등에서 각 지역별 상황과 환경 등에 의해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식문화를 생성시켰던 것이다.


2. 인간생명의 풍성함을 이룬 양식

1) 고구마(기근 해결)

고구마의 원산지는 멕시코 · 콜롬비아 등 더운 북 · 중미지역이다. 이들 고구마는 마야 · 아스텍 · 잉카 문명의 사람들이 주로 재배했으며 품종도 개량했다. 콜럼버스 4차 항해 때 유럽에 전해졌고, 1521년 마젤란이 필리핀 세부 섬에 도착하여 사망 후, 아시아는 1571년 스페인의 레가스피가 마닐라 점령 때 고구마가 멕시코로부터 직접 전해졌다. 필리핀 루손 섬에서 중국의 복건성에 전파되어, 통신사의 내왕을 통해 고구마가 조선에 전해졌다.

1763년(영조 39년) 겨울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정사 조엄(趙曮)이 쓰시마에 머무르는 동안 고구마의 맛과 그 생산성의 우수함을 보고 재배방법을 배워 동래와 제주도에 심은 것이 최초다. 고구마는 경상도와 전라도에 급격히 보급되고, 경기도까지 북상해 19세기 도선의 기근을 해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 감자(빈민의 빵)

인류가 만들어낸 재배식물 가운데 아메리카 대륙에서 기원하는 것이 많고, 또한 대부분이 우수한 작물들이다. 옥수수, 호박, 토마토, 고추, 강낭콩, 버지니아 딸기, 파인애플, 카사바(멜론의 일종), 초콜릿, 코카, 고구마, 감자가 대표적이다. 감자의 원산지는 남미 페루 남부로부터 볼리비아 북부에 걸쳐 있는 중앙안데스의 중앙부 고원지대, 특히 티티카카 호수 주변부이다. 당시 이 지역을 석권하고 있던 잉카제국의 사람들이 감자를 주식으로 했다. 감자가 아주 추운 지역에서도 생장이 가능하고, 해발 4,000m나 되는 고지대에서도 자라나는 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16세기 중엽, 스페인 사람들이 페루의 은(銀)광산에서 채취한 은을 배에 싣고 유럽으로 갈 때 배의 식량으로 감자를 싣고 갔다. 스페인 · 이태리를 거쳐 중유럽과 동유럽에까지 갔고, 영국과 아일랜드 등지로 보급되었다. 감자는 전분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비타민 C가 많아서 감자를 많이 먹으면 긴 항해를 하는 중에도 괴혈병(壞血病)에 걸리지 않았으며, 긴 항해를 하면 감자는 주요 식품으로 대량으로 선적되곤 했다.

중세 유럽의 역사는 굶주림의 역사라고 한다. 이런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황작물이 감자다. 중세 유럽인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물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식사를 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지배계층은 식사로 사슴, 산돼지 통바비큐, 소, 양, 돼지, 닭고기에 빵, 치즈, 고기파이 등과 야채, 과일, 벌꿀, 포도주, 맥주 등을 먹기는 했으나, 이렇게 육식을 하기 위해서는 동물이 살찌는 가을 동안 도살을 하고, 그런 후에 그 고기를 어떤 방법으로든 다음해 봄까지는 보관해야 한다.

이 저장육은 다량의 향료와 후추 없이는 도저히 먹기가 힘들 정도로 역겨웠다고 한다. 이러한 식품을 보다 맛있게 하기 위한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동방무역이 성행하게 되었고, 그것은 십자군전쟁에서부터 지리상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영국 농노의 식사는 아침에 빵과 맥주 한잔 또는 물, 점심은 치즈와 빵, 양파 한두 조각과 맥주 한잔, 저녁(주식)은 수프, 빵과 치즈, 가끔씩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먹는다. 이처럼 빈약한 식생활도 평화시의 일이며, 일단 기근이 들었을 때의 참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이와 같은 유럽의 기근 구제에 큰 공헌을 한 것은 지리상의 발견기에 신대륙에서 가져온 많은 식용작물이었다. 유럽인은 잉카와 아스텍 두 제국을 잔혹하게 멸망시켰는데, 마야 · 아스텍 · 잉카 문명을 이룩한 사람들 - 인디오들이 오랜 세월 동안 가꾼 재배식물의 상당수는 유럽사람들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풀었던 것이다.

감자가 차츰차츰 유럽인들의 주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정치적 압력에 의해 강제로 감자를 주식으로 삼게 된 나라는 아일랜드다. 영국의 청교도혁명을 이끌었던 크롬웰은 혁명직후, 가톨릭을 신봉하고 있던 아일랜드를 침략하고, 1652년 아일랜드 식민법을 제정하여 토지수탈을 단행했다. 이 때문에 아일랜드 전체 경작지의 2/3가 영국인 지주의 소유가 되었고, 몰락한 아일랜드 인은 영국인 지주 밑에서 소작인으로 일하던지, 아니면 신대륙이나 영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 인은 값싼 임금을 받으면서 일했다.

영국인은 “아일랜드 인은 감자만 먹고 일한다”면서 아일랜드 노동자들을 경멸했지만, “세계의 공장”이라는 영국의 산업혁명과 그 후의 영국경제를 그늘에서 지탱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들 아일랜드 인 노동자들이었다. 한편 아일랜드 소작인의 생활은 혹독했으며, 때로는 ‘백인노예’라고 불릴 정도였다. 아일랜드의 인구는 1641년의 150만에서 1652년에는 85만 명으로 절반이 줄어들었다. 영국은 아일랜드를 자국의 식량 공급지로 만들었다. 아일랜드에서 생산되는 밀은 수출용으로 돌려지고, 17세기 초엽에는 감자가 아일랜드 인의 주식이 되었던 것이다.

1845년 아일랜드에는 병충해가 퍼져 감자 농사가 전멸했고, 감자를 사료로 하여 농가에서 기르던 소나 돼지도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양결핍으로 병에 걸리거나 기아로 목숨을 잃게 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으며, 소작료를 내지 못한 농노들은 영주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추방당했다. 그리하여 매년 수천 명의 아사자와 160만 명(1845~75년 통계) 이상의 해외 이주자가 나왔다.

케네디 미대통령의 조부도 이때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 중의 하나다. 그러나 대기근(大饑饉)이란 참상이 진행되고 있는 한편에서는 매년 50만 톤 이상의 밀이 영국으로 송출되고 있었으며, 그것은 아일랜드의 전체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양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식민지 지배가 가진 가공할 만한 본질을 잘 나타낸다.

감자는 동일 면적당 생산량이 보리 등 다른 작물에 비해 1.5배나 많았으므로 인간이 다 먹지 못하고 남는 잉여 감자는 가축들, 주로 돼지들에게 아주 좋은 사료가 되었고, 그리하여 돼지의 사육도 보편화되었다. 이렇게 돼지사육이 확대됨에 따라 유럽인들은 서서히 육식을 하게 되었는데, 19세기 후반 돼지육의 생산량과 소비량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서구 유럽이 본격적으로 육식을 하게 된 데에는 감자의 역할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경제성장기의 유럽에서는 자국의 곡물생산량 또한 급속히 증가하여 곡물도 인간이 다 먹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를 또한 가축에게 주게 되었고, 가축에 의한 육류 생산은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감자보다 더 좋은 곡물사료가 사용되는 바람에 결국 감자의 생산량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으나, 감자가 이미 유럽인들의 주요 식품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3) 빵

빵이란 넓은 의미에서 곡물이나 나무열매 등 전분이 많은 식물을 총칭하는 말이고, 좁은 의미에서는 곡물을 빻아서 우유와 물을 넣어 저은 다음 구운 것을 말한다. 빵에는 발효시키지 않은 것과 발효시킨 것이 있는데, 전자를 주식으로 하는 지역과 후자를 주식으로 하는 지역은 확실하게 나누어져 있다. 그것은 그 지역의 자연적 환경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빵의 재료, 연료, 혹은 이주하며 살든지 한 곳에 정착해서 살든지 하는 주변 환경에 따라서 결정된다. 빵을 주식으로 하는 민족에게는 빵을 어느 정도 확보하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생명이 가름되기 때문에 빵은 아주 중요시할 수밖에 없다.

발효시키지 않은 빵은 밀 · 옥수수 · 잡곡 등 다종다양한 곡물로써 만들 수가 있다. 밀을 재배하기 시작한 문화는 약 1만 년 전 서아시아의 비옥한 삼각지대인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나타났다. 인류가 빵을 만들기 시작한 곳도 바로 이 지역이다.

발효시키지 않은 빵은 돌판이나 철판을 뜨겁게 하여 굽고 야채나 고기, 두부 삶은 것 등을 치즈 · 샐러드 · 과일 등을 말거나 혹은 헝겊으로 덮어서 찌기도 한다. 발효시킨 빵의 경우는 가장 좋은 재료가 보릿가루다. 빵을 발효시킨다는 것은 효모균을 빵 반죽에 넣고 알코올과 탄산가스를 발생시켜 반죽을 팽창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보릿가루에 물을 넣어 반죽을 하면 탄산가스를 포함한 보리단백질(글루텐 : Gluten)이 형성되어 반죽이 고무풍선처럼 팽창하게 되고, 이 때문에 잘 부풀어 오른 빵이 만들어진다.

보릿가루를 섞지 않은 빵은 글루텐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부풀어 오르지 않는다. 고대의 빵은 밀이나 보리 한 가지로써 만들어졌지만, 점차 보리와 쌀이 섞이며 발달했기 때문에, 유럽의 빵을 연구하는 이들은 발효되지 않은 빵을 원시적인 형태의 빵으로, 발효된 빵을 발달된 형태의 빵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최근에 민족학 내지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다채로운 무발효 빵의 문화를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빵 굽는 기술이 유럽 전체에 퍼져 나가면서 빵은 주식으로 이용되었는데, 특히 르네상스기에 와서는 빵의 질도 좋아졌고, 나아가 지역이나 국가에 따라 빵의 성격도 다양하게 되었다. 자기 나라 고유의 개성적인 빵이 발달한 나라들은 프랑스 · 오스트리아 · 헝가리 · 독일 등인데, 프랑스에서는 막대 모양의 바케트 빵, 미국에서는 윗부분을 판판하게 구운 샌드위치형 빵이 발달했으며, 영국에서는 고대 로마로부터 직접 빵 만드는 방법이 전해져서 영국 나름대로의 독특한 스타일인 산과 같은 형태의 식빵이 발달했다. 또한 빵은 밀가루 · 식염 · 이스트 등만을 배합해 겉쪽은 두껍게 구운 유럽식 빵과 설탕 · 우유 · 유지 등을 배합하여 겉은 얇고 부드럽게 구운 미국식 빵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 대체로 고대부터 쌀을 주식으로 삼아왔기 때문에 빵문화는 발달하지 못했다. 서양식 빵에 비유할 수 있는 만두와 같은 밀가루 음식은 상당히 발전했다. 일본은 16세기 포르투갈 인들로부터 전해져 포르투갈어인 빵으로 되었다. 1877년경 속에 단팥을 넣은 소위 “앙꼬빵”이라는 것을 만들어 세계적인 빵이 되었다.

일본은 전쟁 중에 쌀음식[米食]보다는 가볍고 휴대하기 쉽고, 아무 곳에서나 먹을 수 있는 빵이 편리했으므로, 도넛형의 빵을 만들어 실로 꿰어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먹도록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19세기 말에 들어 왔으나 경제가 발달한 1980년대 중기 이후에 보편화되었다. 서양 사람들이 주식이 고기인 것으로 착각하나 실은 빵이다.

 

4) 면(; 국수)

면(麵)이란 밀가루[小麥]에 물을 부어 반죽을 한 후 이를 펴서 칼로 가늘게 자른 다음 말려서 물에 넣어 끓여 먹거나, 혹은 만들자마자 젖은 그대로 끓여 먹는 음식을 말한다. 국수 역시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국수의 종류를 총칭해서 면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면류(麵類)라고 한다.

소맥분 그 자체를 이용하여 만든 것을 면이라고 하고, 이 원재료를 가공하여 만든 것을 병(餠)이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나라는 병(餠)이라는 개념이 떡으로 인식된다. 중국에서는 병(餠)은 빵의 뜻이다. 우리나라는 빵과 떡은 곡식을 빻아서 만든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 밀이냐 쌀이냐 - 원재료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면은 기원전 5000년경에 아시아에서 시작됐다. 가늘고 긴 형태는 3세기경 위 · 촉 · 오 3나라로 분열되어 싸우는 삼국시대에 위나라 기록에 나온다. 면은 조리하는 방법에 따라 대체로 온면과 냉면으로 나누어진다. 원래 우동이라는 말은 뜨거운 물에 넣고 끓여서 조리하는 모든 면류를 총칭했던 말이다. 일본인들에게 우동류와 조리방식은 같으나 우동보다 더 상위로 치는 ‘소바’는 메밀의 뜻이다. 즉 메밀국수다.

“우동이든 소바든 모두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다. 인스턴트 라면도 중국 북방에서 유행되고 있는 ‘라미엔’이다.” 중국에는 타로면(따루미엔), 탕면(탕미엔), 작장면(자짱미엔), 도삭면(따우사우미엔), 신면(천미엔), 과교면(꾸어치아우미엔) 등이 있다.

 

5) 두부

두부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음식이다. 두부는 콩으로부터 추출해낸 식물성 단백질로서 인체에 아무런 해를 주지 않으면서 많은 영양소를 공급해주고 있어, ‘동양의 가효(佳肴)’라고 일컬어진다. 또한 두부는 더울 때는 차게 해서 먹고, 추울 때는 뜨겁게 해서 먹을 수 있는 사시사철의 음식이다. 특히 두부의 원조국인 중국에서의 인기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두부는 그 종류도 다양해서 단단한 북두부(北豆腐) · 부드러운 남두부(南豆腐) · 두부건(豆腐乾 : 누른 두부) · 동두부(凍豆腐 : 얼린 두부) · 두사(豆渣 : 비지) 등이 있다.

또 중국인들은 두부를 가공해서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먹는데 이는 두부의 맛을 한층 더 즐기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이 중 아침식사를 할 때 먹는 떠우짱(豆醬), 술안주에 최고며 식사 때 반찬으로 제일인 두부를 발효시켜 만든 장떠우푸(醬豆腐)와 처우떠우푸(臭豆腐), 소화가 잘 되어 환자의 식사에 최고인 두부뇌(豆腐腦)라고 하는 두화(豆花) 등이 대표적이다.

광동요리에는 두부요리가 많은데, 그 중에서 대표요리로 꼽는 것은 ‘태사두부(太史豆腐)’라고 한다. 이는 두부탕과 같은 것으로 12개로 자른 두부를 두 마리의 닭을 삶아낸 국물 속에 넣은 것이다. 사천요리는 사천지방의 요리로 들과 산의 산물이 풍부하고 두부요리, 해산물요리 등이 매우 유명하며, 진하고 자극적인 맛이 특징으로 대표적인 요리는 마포어떠우푸(마파두부 : 麻婆豆腐)이다. 우리나라도 두부요리는 옛날부터 진미 중의 진미로 쳐왔고, 또 성스러운 음식으로 여겨 중요한 행사에는 반드시 두부를 손수 만들어 공양했다.

 

6) 옥수수

옥수수의 원산지는 멕시코로부터 과테말라에 이르는 중남미로 알려지고 있다. 약 7000년 전부터 멕시코에서는 마야문명이 옥수수를 주작물로 하는 화전경작이 발달하여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 오늘날 중앙 안데스지역에서는 옥수수의 태반을 주식으로 이용하기보다 치차술을 만들어 제전에 쓰고 있다. 그러나 중앙아메리카 지역에서는 옥수수를 주식으로 이용하였고, 옥수수를 가루로 만들어 반죽을 한 다음 넓게 펴서 굽는 ‘또띠야’라고 하는 빵을 오늘날까지도 즐겨 먹는다.

콜럼버스의 기록에 스페인에 가지고 들어온 옥수수는 순식간에 스페인 전역에 퍼졌고, 동시에 전세계로 퍼졌다. 16세기 전반에 지중해를 넘어 동유럽과 북아프리카에까지 보급되었다. 16세기 중엽에 포르투갈이 인도 · 동남아시아 · 중국 등지로 전해졌고, 그 후 일본과 한반도에 전해졌다.

현재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지역은 중남미 일부 지역과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그러나 예전에 인간이 선호했던 만큼, 이제 옥수수는 동물사육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식량이기 때문에 세계 각국 사람들이 육식을 선호하게 되면서부터 옥수수는 점점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계의 옥수수 생산량은 보리와 쌀에 이어 3위를 기록했으며, 머지않아 보리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7) 바나나

바나나의 원산지는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발달한 인도문화권 지역으로, 말레이반도라고 할 수 있다. 바나나는 동남아시아로부터 서인도와 아프리카로, 동으로 태평양제도를 거쳐 중남미로 전파되었다.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해에서 주로 재배되다가 미국과 유럽으로 전해졌다.

세계 농경문화의 근원지는 4곳으로 알려졌다. 밀 · 보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지중해 농경문화, 바나나 · 토란 등을 중심으로 하는 동남아시아의 근재(根裁)농경문화, 참깨 · 조롱박 등을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의 사바나 농경문화, 옥수수 · 감자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신대륙 농경문화가 그것이다. 지금까지 다수확 · 보존 · 비축 등이 가능한 곡물류를 생산해낸 서아시아가 오리엔트의 고대문명을 이룩했다는 이유 때문에 지중해 농경문화만을 중시해왔다.

바나나는 모든 과일 중 품종개량에 가장 성공했다. 열대지방에서도 유례가 드물게 4계절 수확이 가능한 과일이 되었다. 씨가 없다는 점에서 포도나 귤 종류, 더욱이 사과나 복숭아 등과는 큰 차이가 있는 대단한 발전을 이루었다. 바나나에서 단위결과성(單位結果性)이라는 유전적 돌연변이체를 찾아냈고, 이를 토대로 하여 3배체를 주력으로 하는 씨 없는 과일을 실용화시켰다. 바나나는 과일 중에서 가장 생산량이 많으며, 껍질을 벗겨서 먹는 것 말고도 삶거나 굽거나 말리거나 찌거나 가루로 만들거나 술을 담가서 먹는 등 그 요리방법이 다양하다.

바나나는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해에서 재배되고 있으며, 미국과 유럽으로 반입되고 있다. 1871년 메사추세츠 주의 선장이었던 베이커는 자메이카에서 보스톤으로 바나나를 수송하여 거액을 벌었다. 베이커(Baker)는 1885년 보스톤 과일상 프레스톤과 함께 ‘보스톤 과일상사’를 설립했고, 미국에서 대량의 바나나를 판매하여 많은 이익을 올렸다. ‘보스톤 과일상사’는 1889년 중미(中美)의 철도왕 오스가 경영하는 열대무역수송회사를 합병하여 ‘유나이티드 프루츠사(United Fruits Co.)’를 창설했다.

UF사는 바나나 부문과 철도부문의 경험을 살려 미국과 중미의 바나나 무역회사와 바나나 농장과 항구를 연결하는 철도를 차례대로 사들였고, 1910년경에는 중앙아메리카의 ‘녹색제국’ 또는 ‘바나나제국’이라고 일컬어지는 거대한 바나나 독점 회사로 성장했다. UF사는 코스타리카 바나나의 99%, 파나마의 93%, 과테말라의 75%를 지배했고, 코스타리카 철도의 전부와 기타 주요 항만과 철도를 지배하에 두었다.

UF사는 또한 과테말라의 거의 모든 바나나 농장, 철도, 항구를 지배하에 두고, 이 나라의 바나나 수출을 독점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전력, 수도, 경찰, 학교, 병원까지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UF사의 독점에 대해 과테말라 민중은 UF사와 친미정권에 대해 저항운동을 전개하여 1950년 민족주의적인 알벤스 정권을 수립했다.

알벤스 정권은 1952년 70만 에이커의 국유지와 UF사 소유의 휴한지를 포함한 50만 에이커를 사들여 약 6만 명 정도의 토지없는 농민에게 분배하는 계획에 착수했다. 그러자 UF사는 거금을 투입해서 반혁명군을 지원하여 알벤스 정권을 쓰러뜨렸다. 일개 회사가 한 나라의 정권을 무너뜨렸다.

1963년, 일본정부는 바나나 수입을 자유화했다. 일본시장의 전망이 좋다고 확신한 유나이티드 브란즈사와 캐슬&크루츠사가 1964년 필리핀의 민디나오에 진출했다. 이어서 미국의 델몬트사와 일본의 스미토모(住友)상사가 진출해, 이들 4개의 회사에서 필리핀의 수출용 바나나 90%를 독점해 버렸다. 이들 외국 자본은 대지주로부터 토지를 사들인 뒤 불도저를 투입하여 자작농들을 몰아냈는데, 농민들이 얻어낸 것은 담배 한 갑 정도의 보상금에 불과했다.

농민들은 다바오시(市)의 빈민가로 흘러들어 가든지, 정글 깊숙이 들어가든지, 아니면 이들 외국 자본이 경영하는 바나나 농장에서 일할 수 밖에 없었다. 노동력이 풍족했던 까닭에 바나나 농장의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에다가 농장의 열악한 숙소에서 생활하며, 농장의 하늘에서 살포되는 대량의 농약을 뒤집어쓰고 일하므로 피부와 체력을 좀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