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은 다르지 않다
20세기 초 형이상학은 모두 헛소리라고 주장하는 급진적인 철학자 그룹이 등장했다. 그들이 보기에, 철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철학을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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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인
출생 - 사망 1908.6.25. ~ 2000.12.25.
20세기 초 형이상학은 모두 헛소리라고 주장하는 급진적인 철학자 그룹이 등장했다. 그들이 보기에, 철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철학을 연구한다고 해서 세계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지식의 전형은 바로 경험과학, 그 중에서 특히 물리학이다. 세계에 관한 지식은 철저히 경험에 근거해야 하며, 그렇지 않은 것들은 모두 무의미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흔히 이들은 논리 실증주의자(Logical Positivists)라고 불린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주로 활동했기에, 비엔나 서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슐리크(Moritz Schlick, 1882~1936), 노이라트(Otto Neurath, 1882~1945), 카르나프(Rudolf Carnap, 1891~1970) 등이 대표적인 논리 실증주의자들이다. 물론 이들 역시 철학자들이다. 철학자 스스로가 세계에 관한 어떤 지식도 철학으로부터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왜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철학을 연구하는가? 인간의 지적 성장에 있어 철학의 임무는 무엇인가?
논리 실증주의:
헛소리를 제거하라!
거칠게 말해, 그것은 헛소리를 제거하는 것이다. 철학은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것은 경험 과학이 할 일이다. 철학이 할 일은 따로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지식들이 있다. 아니 지식인 척하는 것들이 있다. 철학이 할 일은 바로 그것들이 진정한 지식이 아니고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내 제거하는 것이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이런 임무를 완료하여, 형이상학과 같은 가짜 지식을 인간 지식 체계에서 추방했다, 아니 그러길 바랐다. 성공했는가? 그렇지 않다. 이번에 다룰 이야기는 논리 실증주의 철학적 기획의 실패에 대한 것이다. 특히, 논리 실증주의의 적자(嫡子)이면서 논리 실증주의를 무너뜨린 철학자 이야기다. 아비를 배신한 아들은 바로 콰인(W. V. O. Quine, 1908~2000)이다.
1908년에 태어난 콰인은 1932년에 하버드에서 논리학에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지도 교수는 러셀과 함께 [수학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쓴 화이트헤드(A. Whitehead)였다. 학위를 마친 콰인은 유럽으로 건너간다. 그 곳에서 약 2년을 머물면서 다양한 철학자들을 만난다. 그 중 한 명이 프라하에서 [언어의 논리적 구문론(Logical Syntax of Language]라는 책을 쓰고 있었던 카르나프였다. 그 후 하버드로 돌아온 콰인은 세 번에 걸쳐 카르나프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된다. 콰인이 세상을 떠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78년에 하버드에서 은퇴했지만, 죽기 직전까지 계속해서 글을 썼으며 논문을 출판했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논리실증주의자들에게 있어 철학은 과학과 다르다. 철학이 할 일은 지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 체계 속에 포함되어 있는 헛소리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럼,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생각하는 ‘헛소리’는 무엇인가? 그들은 경험에 의해서 참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것들만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전문 철학 용어를 사용하자면, 경험에 의해서 검증될 수 있는 것만이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즉 논리 실증주의자들에게 경험에 의해서 검증될 수 없는 진술들은 모두 무의미한 ‘헛소리’일 뿐이다. 그럼 어떤 진술이 경험에 의해서 검증될 수 있는가? ‘저 앞에 있는 소나무는 초록색이다.’와 같은 진술이 대표적이다. 우리는 저기 앞에 있는 소나무를 관찰하여 그것이 초록색인지 그렇지 않은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저 앞에 있는 소나무는 초록색이다.’와 같은 진술들은 유의미하다. 전문 용어를 사용하자면, 이렇게 경험을 통해서 진위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진술들을 ‘관찰 명제’라고 한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이런 관찰 명제들은 모두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관찰 명제가 아닌 것들은 모두 헛소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경험 과학의 수많은 진술들이 헛소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가령 ‘전자의 정지 질량은 9.107×10-28g이다.’라는 진술을 생각해보자. 이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경험에 의해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전자는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전자에 대한 이 진술은 경험에 의해서 참 거짓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 번 전문 철학 용어를 사용하자면, 이런 진술들은 ‘이론적 명제’라고 불린다. 거칠게 과학 이론에 등장하는 명제들 정도로 생각하자. 아무튼 만약 경험에 의해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모두 헛소리라고 말한다면, 수많은 이론적 명제들은 헛소리가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중요한 임무 중에 하나는 경험에 의해서 직접 검증할 수 없는 수많은 이론적 명제들이 유의미한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된다. 어떻게?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선택한 방법은 이론적 명제들을 관찰 명제들로 바꾸는 것이다. 가령 ‘전자의 정지 질량은 9.107×10-28g이다.’를 경험에 의해서 직접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명제로 바꾸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특별한 것들이 필요하다. 우선, ‘전자’라는 용어를 직접 관찰될 수 있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바꾸어야 한다. (비록 엄밀하지 않지만) 가령, ‘전자란 음극선 실험에서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물질이다.’로 전자를 먼저 관찰 가능한 용어들로 정의해야 한다. 그리고 논리학과 수학을 이용해서 ‘전자의 정지 질량은 9.107×10-28g이다.’를 (물론 또 엄밀하지 않지만) ‘음극선 실험에서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것의 질량은 9.107×10-28g이다.’로 바꾸는 것이다. 그럼, 직접 관찰될 수 없는 전자에 대한 진술이 직접 관찰될 수 있는 푸르스름한 빛 등에 대한 진술로 바뀐다. 이제 바뀐 진술들은 경험에 의해서 직접 검증할 수 있게 되고, 따라서 유의미한 명제가 된다. 어렵게 말하자면, 철학자들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이론적 명제를 관찰 명제로 환원한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제시한 사례는 무척 조잡한 것이다. 실제로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제시한 방법은 이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복잡하다.)
참/거짓이 세계의 생긴 모습에 의존하는 종합명제
참/거짓이 의미에만 의존하는 분석 명제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다. 이론적 명제를 관찰 명제로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수적인가? 그것은 바로 정의(definition)다. 관찰할 수 없는 ‘전자’라는 용어를 관찰 가능한 것들로 정의할 수 있어야 이론적 명제를 관찰 명제를 바꿀 수 있다. 더 나아가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정의도 유의미하고, 참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의를 이용해서 관찰 명제로 바뀐 이론적 명제들도 유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정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왜 참인가? 다음 두 진술을 생각해보자.
(가) 모든 백조는 흰색 조류다.
(나) 모든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
(가)는 앞에서 이야기한 관찰 명제와 유사한 것이다. (나)는 '총각'이라는 말을 정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진술은 어떻게 다른가?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각 진술들의 참 거짓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가)의 진리 여부는 무엇에 의해서 결정되는가? 그것은 세계의 생긴 모습에 의해서 결정된다. 즉 이 세계에 있는 모든 백조가 흰색 조류라면 (가)는 참이고, 그렇지 않다면 (가)는 거짓이다. 따라서 (가)의 진위를 확인하고 싶으면, 세상으로 나가 이 세계의 모든 백조들을 관찰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어떤가? 당신은 왜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가 참이라고 생각하는가? (나)가 참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모든 총각들의 가족 관계 확인서를 검사할 필요는 없다. (나)의 진위는 단지 ‘총각’, ‘결혼’, ‘남자’라는 단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으로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즉 단어의 의미만으로 (나)의 진위가 결정된다. (물론 (가)는 그렇지 않다. 당신은 ‘백조’, ‘흰색’, ‘조류’라는 단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도, (가)의 참 거짓을 결정할 수 없다.)
여기서 잠깐 전문 철학 용어를 이용해서 정리해보자. 철학자들은 참/거짓이 세계의 생긴 모습에 의존하는 명제를 ‘종합 명제’라고 부른다. 그리고 참/거짓이 의미에만 의존하는 명제를 ‘분석 명제’라고 부른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에게 관찰 명제와 관찰 명제들로 환원되는 이론적 명제들은 모두 종합 명제들이다. 그리고 그 환원을 가능케 하는 정의와 같은 것은 모두 분석 명제들이다. 이런 점 때문에,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원대한 목표, 즉 이론적 명제를 관찰 명제로 환원하여 인간 지식에서 헛소리를 제거하고자 하는 목표는 분석 명제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순간, 콰인은 논리 실증주의자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게 된다.
분석 명제와 종합 명제는
구분될 수 없다
콰인은 물어본다. 분석 명제는 왜 참인가? 앞에서 말했듯이, 분석 명제의 참은 의미에 의해서 결정된다. 즉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이다.’는 진술이 참인 것은 ‘총각’이 의미하는 것과 ‘결혼하지 않은 남자’가 의미하는 것이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이 같다는 말은 아마도 ‘총각’과 ‘결혼하지 않은 남자’가 동의어라는 말일테다. 그럼 다시 물어보자. ‘총각’과 ‘결혼하지 않은 남자’가 동의어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어떤 철학자는 ‘총각’과 ‘결혼하지 않은 남자’가 동의어라는 것은 그 둘을 서로 바꿔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 설명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 두 진술을 생각해보자.
(다) 한강에 있는 백조는 목이 길다.
(라) 내 친구들 중에서 철수만 총각이다.
(라)의 ‘총각’을 ‘결혼하지 않은 남자’로 바꾸어보자. 그럼 ‘내 친구들 중에서 철수만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가 된다. 이렇게 ‘총각’을 ‘결혼하지 않은 남자’로 바꾼다고 하더라도 (라)의 참/거짓은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동의어이고, 그러므로 (나) ‘모든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는 분석 명제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의 ‘백조’를 ‘흰색 조류’로 바꾸어보자. 그럼 ‘한강에 있는 흰색 조류는 목이 길다.’가 된다. 하지만 만약 한강에 목이 짧은 흰색 비둘기가 있다면 이 진술의 참/거짓은 원래의 (다)와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백조’와 ‘흰색 조류’는 동의어가 아니고, 그러므로 (가) ‘모든 백조는 흰색 조류다.’는 분석 명제가 아니라 종합 명제가 된다.
어떤가? 이런 식으로 동의어를 설명하고, 동의어를 이용해서 분석 명제를 설명하는 것은 그럴싸해 보이는가? 하지만 문제가 있다. 심장을 가진 모든 동물은 신장을 가지고 있으며, 신장을 가진 동물은 모두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다음 진술을 생각해보자.
(마) 백조는 심장을 가진 동물이다.
이제 (마)에 등장하는 ‘심장을 가진 동물’이란 표현을 ‘신장을 가진 동물’로 바꾸어보자. 그럼 다음 진술이 된다.
(바) 백조는 신장을 가진 동물이다.
앞에서 심장을 가진 모든 동물은 신장을 가지고 있으며, 신장을 가진 동물은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했다. 따라서 (마)가 참이라면, (바) 역시 참이다. 마찬가지로 (마)가 거짓이라면, (바) 역시 거짓이다. 즉 ‘심장을 가진 동물’이라는 표현과 ‘신장을 가진 동물’이라는 표현은 진리 값의 변화 없이 서로 바꾸어서 사용할 수 있다. 그럼 ‘심장을 가진 모든 동물은 신장을 가지고 있다.’는 분석적인 명제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심장을 가진 모든 동물은 신장을 가지고 있다.’는 진술이 참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심장’, ‘동물’, ‘신장’의 의미를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세상으로 나가 세계를 관찰해야 한다. 즉 ‘심장을 가진 모든 동물은 신장을 가지고 있다.’는 종합 명제다. 따라서 동의어를 진리 값의 변화 없이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표현으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다. 더 나아가 동의어라는 개념만으로 분석 명제를 종합 명제와 구분하여 설명할 수 없다. (콰인은 여기에 필연성이라는 개념을 이용해 동의어를 설명하는 전략을 소개한다. 하지만 이 전략은 순환적이라는 것이 콰인의 지적이다.)
그럼 동의어를 이용하는 것 말고 분석 명제와 종합 명제를 구분하는 다른 방법은 없는가? 한 가지 방법은 분석 명제가 아닌 것을 규명하는 것이다. 즉 종합 명제가 무엇인지 제시하고, 그것을 제외한 것은 분석명제라고 말하면 된다. 그럼 논리 실증주의자들에게 종합 명제는 무엇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보자. 앞에서 경험에 의해서 검증될 수 있는 것들을 종합 명제라고 불렀다. 여기에는 이론적 명제와 관찰 명제가 모두 포함된다. 과학 속의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많은 명제들은 참인 것이 밝혀지고, 많은 명제들은 거짓인 것이 밝혀진다. 이렇게 실험과 관찰에 의해서 진리 값이 결정되는 것들은 모두 종합 명제들이다. 따라서 분석 명제를 무엇을 실험하든, 무엇을 관찰하든 그 진리 값이 바뀌지 않는 명제라고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콰인 철학의 핵심 논제 중에 하나가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인식론적 전체론(Epistemological Holism)’이다. 어렵지만 콰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외부 세계에 대한 진술들은 개별적으로 감각 경험의 법정에 서지 않는다. 그것은 집단적으로 감각 경험과 마주한다.”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콰인의 말은 경험에 의해서 평가되는 것은 개별 진술들이 아니라 지식 체계 전체란 말이다. ‘모든 백조는 흰색 조류다.’는 진술을 다시 생각해보자. 조류학자가 이곳저곳에 있는 백조들을 관찰했다. 그런데 호주에서 검은 색 백조가 발견되었다.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검은 색 백조가 관찰되었으니 ‘모든 백조는 흰색 조류다.’는 진술은 거짓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모든 백조는 흰색 조류다.’는 진술이 여전히 참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어떻게? 간단하다. 동물 분류 체계를 다시 만들면 된다. 즉 새들을 새롭게 분류하여, 검지 않은 것은 백조가 아닌 것으로 분류 체계를 만들면 된다. 이런 식으로 인간 지식 체계를 급진적으로 수정한다면, 무엇을 경험하든 모든 명제가 경험과 무관하게 진리값을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과학이 무엇을 실험하든, 무엇을 관찰하든 그 진리값이 바뀌지 않는 명제라는 규정 역시 분석 명제에 대한 설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위에서 설명한 다양한 논의를 통해서 결국 콰인은 분석 명제와 종합 명제는 만족스럽게 구분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물론, 논리 실증주의자들에게 이런 결론은 치명적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철학은 세계에 대한 어떤 지식도 만들어내지 않는다고 했다. 철학이 할 일은 지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헛소리, 혹은 가짜 지식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짜 지식들은 정의와 같은 분석 명제와 논리학을 이용해서 제거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콰인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분석 명제가 경험적 명제인 종합 명제와 구분되지 않는다고 밝혀냈다. 이제 논리 실증주의의 기획은 혼란에 빠진다.
철학과 과학:
콰인 vs 비트겐슈타인
그럼 이제 논리 실증주의의 철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앞에서 설명한 용어들로 이야기하자면, 논리 실증주의자들에게 경험에 의해서 검증될 수 있는 종합 명제들은 과학의 영역에 있는 것들이며, 그런 종합 명제들이 헛소리인지 평가하기 위한 분석 명제들은 철학의 영역에 있는 것들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과학과 다르며, 철학의 임무는 지식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학이 만들어낸 지식을 평가하여 헛소리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콰인에 의해서 종합 명제와 분석 명제의 구분은 불분명해졌다. 즉 과학의 영역과 철학의 영역은 분리할 수 없다. 따라서 철학과 과학 역시 구분되지 않는다. 더 이상 철학은 과학 밖에서 과학을 평가할 수 없다. 논리 실증주의 프로그램은 이룰 수 없는 목표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철학과 과학을 구분하지 않는 콰인의 입장은 ‘자연주의(naturalism)’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분석 철학적 전통에서 핵심적인 인물로는 비트겐슈타인과 콰인이 꼽힌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철학관에 큰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 비트겐슈타인과 콰인의 차이는 철학과 과학 사이의 관계로 분명해진다. 콰인의 자연주의와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실증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철학의 영역과 과학의 영역을 구분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 눈앞에서 펼쳐지는 과학의 방법들을 지속적으로 보아온 철학자들은 과학과 같은 방식으로 문제에 답하고 싶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이런 경향이야말로 형이상학의 진정한 원천이다. 그리고 그것은 철학자들을 완전한 암흑으로 몰고 갈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철학과 과학은 같은 것인가? 아니면, 그 둘은 다르고 철학은 과학과 다른 특별한 임무를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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