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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의 창시자 퍼스, 행위에서 기호로 [생활속의철학]

by csr1974m 2025. 9. 14.

 

기호학의 창시자 퍼스

지속적으로 기대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처한 현 상황이 요구하는 것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음을 우리는 관찰할 수 있다. (찰스 샌더스 퍼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는 1839년 미국 동부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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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1839.9.10. ~ 1914.4.19.

 
지속적으로 기대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처한 현 상황이 요구하는 것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음을 우리는 관찰할 수 있다. (찰스 샌더스 퍼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는 1839년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주의 케임브리지에서 하버드 대학의 천문학 및 수학교수 벤자민 퍼스(Benjamin Peirce)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살에 형의 논리학 책을 빌려 보기 시작하면서 논리학과 사고의 규칙이라 할 수 있는 추론에 평생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63년 하버드에서 그는 화학을 전공하여 최우등으로 학사학위를 받았고 철학자가 된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와 평생 지속되는 교우관계를 맺었으나, 그를 가르쳤던 강사 엘리엇(Charles William Eliot)은 퍼스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엘리엇은 1869년부터 1909년까지 하버드의 총장에 있으면서 모교에서 자리를 잡으려는 퍼스의 모든 시도를 좌절시켰다.

순탄치 않았던 퍼스의 인생

 
퍼스의 인생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첫 부인은 1875년 그를 떠났고, 퍼스는 ‘줄리에트(Juliette)’라는 이름만 알려진 여성과 동거를 하였으나, 8년이 지나 첫 부인이 이혼을 허락한 후에야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할 수 있었다. 퍼스의 여성관계는 지금이라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겠지만, 당시에는 일종의 스캔들로서 교수로 임용되는 데에 결정적 장애가 되었다. 퍼스는 미국해안경비대에서 과학자로서 근무하다 1891년 해고 된 이후에는 일정한 직업이 없었다. 상속받은 유산으로 펜실베니아주의 시골 밀포드에 자신의 설계에 따라 지은 집에서 줄리에트와 평생 살았으나, 생의 마지막 20년을 극심한 가난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겨울에는 난방을 하지 못하고, 밥은 마을 빵가게에서 적선한 굳은 빵으로 때워야만 했다.

살아 있을 때에는 주로 과학자로 알려졌던 퍼스는 여러 권의 책을 기획하여 집필을 시도하였으나 완성된 것은 없었다. 그러나 퍼스는 과학, 수학, 철학 관련 전문학술지에 기고한 다양한 주제의 논문 이외에도 미발표 원고가 1650편, 총 10만 페이지에 이를 만큼 많은 글을 남겼다. 퍼스가 죽자 부인은 서재에 있는 모든 종이를 하버드 대학에 팔았으나, 모교는 1964년까지 그의 유고를 마이크로필름화 하지 않았다. 미국이 낳은 가장 독창적인 철학자가 남긴 글이 사후 100년이 지나도록 모두 정리되어 출판되지 않은 것이다.

전해지는 일화에 의하면 빚쟁이가 찾아왔을 때 퍼스는 천장 위 다락방으로 올라가 사다리를 거두어 버렸다고 한다. 이 상황이 마치 퍼스의 글을 해석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어쩌면 가난과 고독에 시달렸던 퍼스의 글이 사후 100년이 되도록 완전히 출판되지 않은 것도 이와 비슷한 상황인지 모른다. 수학, 논리학, 기호학, 철학 등 많은 분야에서 응당 받았어야 할 최초의 발견 혹은 발명의 영예를 타인에게 양도해야만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사상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많은 용어들은 철학의 주류에 편입되지 않았다. 바로 이점에서 퍼스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사다리가 걷어 올려졌다고 할 수 있다.

퍼스 사상의 핵심 중
하나는 기호학
현실적 의미를 갖는 어떤 결과를 우리가 시도하는 개념화의 대상이 지니리라 생각했는지 살펴보라. 그러면 이 결과들에 대한 개념이 그 대상에 대한 개념의 전체이다. (pragmatical maxim)

 
화학, 지구학, 수학, 논리학, 심리학, 철학, 기호학(semiotics) 등 수많은 분야에서 독창적인 사고를 하였던 퍼스의 중심 사상을 요약하기란 힘들며, 또 그의 사상을 기존의 용어로 분류하는 것 역시 주의를 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스 사상의 핵심중의 하나가 기호학이라는 점에는 큰 이의가 없다. (‘semiotics’란 퍼스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전에는 ‘semeiotics’, 혹은 ‘semeiotike’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퍼스가 “경험에 의해 배울 수 있는 지적 능력의 소유자에 의해 사용되는 모든 기호의 특징”을 연구하는 분야로 규정한 기호학이란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그 이유는 퍼스가 그의 기호이론을 통해서 인간이 이 세계를 분할하고 존재를 구성하는 과정을 재구성(reconstruction)하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이야기는 상식적으로 매우 황당하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이 세계의 모든 존재가 원래부터 그렇게 주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 보자.

‘여름날 대청에 드러누워 화단을 바라본다. 흰 나비가 이꽃 저꽃 주위에 펄럭거리며 날고 있다. 뒷산에서는 매미 소리가 한창이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이런 광경을 상상할 수 있을뿐더러 여름 낮의 깊은 정적에 몰입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가 본 화단에는 몇 개의 사물이 있었을까? 나비 한 마리와 화초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바꿔 말해 이런 질문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특별한 생각 없이 그저 화단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우리는 나비와 화단과 뒷산 및 매미를 포함하여 아무 것도 서로 나누지(분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소나무 한 그루라고 말할 때는 소나무 전체를 말하고 더 이상 나누지 않았지만, 우리가 더 잘게 나누고 싶다면 솔잎 하나하나를 별개의 존재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꽃 주위를 날아다니는 흰 나비에 주목을 하면서 저 나비는 며칠 전 뒷산의 흰 꽃 주위를 날아다니던 그 나비와 같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나비를 화단의 다른 모든 존재들로부터 떼어내고 며칠 전 보았던 나비의 심적 영상(imagination)과 눈앞의 나비가 동일한 유형임을 확인하였다. 실제로 이 두 과정은 하나의 행위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퍼스에 의하면 우리는 도상(圖像, icon)을 통한 기호행위를 하였다. 여기서 퍼스가 말하는 기호란 단지 한글이나 로마자처럼 쓰인 글이나 구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포괄적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통표지판은 물론 인간 및 동물의 표정과 몸짓 역시 모두 기호로 볼 수 있으며, 심지어 지진이 나기 전 관찰되는 동물들의 대이동 역시 기호로 볼 수 있다. 이른바 징후가 그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질병의 진단 역시 기호행위로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이 세계는 기호로 가득 차 있을뿐더러 나아가 기호행위를 통해 비로소 구획된다.

그렇다면 도상을 통한 기호사용은 어떻게 근거지울 수 있을까? 즉 흰 나비에 대한 기억, 심적 영상과 눈앞의 흰나비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퍼스는 양자가 유사관계(likeness relation)에 놓여 있다고 본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 ‘서로 비슷하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지, 그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문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그 어떤 점에서 비슷하기 때문이다. 퍼스 역시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고심을 하였으나 그가 내린 결론은 일단 다음과 같은 사실 확인이다.

그것(순수한 도상)은 오로지, 단순히 그것이 의미하려는 성질(quality)을 보여줌으로써 기호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도상은 그것이 의미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중요한 점은 퍼스가 도상이 표상(represent)하는 것이 개체(個體, individual)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위의 흰 나비의 예에서 심적 영상이 표상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연장된(prolonged) 존재인 개체가 아니라 특정한 색과 형태인 ‘흰나비임’이라는 보편적 유형(type, scheme)이다. 반면에 심적 영상, 즉 도상은 특정한 시공에 놓인 개별자(token)라고 할 수 있다. 즉 구체적 존재를 보편적 유형의 모형, 모범으로 사용하는 것이 도상에 의한 기호 사용의 특징이다.

개체는 어디에 있을까?
연장된 지시로 눈 앞에서 확인한다

 
그렇다면 개체는 어디에 있을까? 아마 이 질문이 괴상하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언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왔고, 그리고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시공에 연장된 개체라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주위를 보면 온통 개체 투성이다. 어제 입었다가 빨아 오늘 입은 바지는 바로 ‘그 옷’이고 아침에 먹다가 시간이 없어서 식탁에 두고 간 사과를 저녁에 들어와 먹으면 바로 ‘그 사과’를 다시 먹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 시공에 연장된 개체 자체를 본 적이 있을까?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항상 순간의 존재들이지 시공에 연장된 개체 자체를 본다는 것은 마치 시간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착각을 전제한다. 물론 어떤 철학자는 개체의 존재를 이른바 ‘연장된 지시(prolonged ostension)’로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그는 사과를 들고 움직이면서 “보시오! 아까 저기 ‘이 사과’가 지금 여기에도 있지 않소!”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이 철학자가 들고 있는 사과가 연장된 지시를 통해서 개체임을 확인하였다는 것은 바로 그것이 개체라는 생각을 해야만 가능하다. 바로 그런 이유로 독일의 철학자 로렌츠(Lorenz)는 ‘이 사과’라는 표현은 본질적으로 애매한 표현이라고 하였다. 즉 시공에 연장되었다는 생각이 없이 여기 지금 있는 사과를 지시할 때는개체성을 지니지 않은 사과를 의미할 뿐이다. 여기서 분명해진 것은 ‘이 사과’가 지칭하는 것이 시공에 연장된 개체를 의미하기 위해서는 추가적 정신작용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퍼스는 이 과정을 지표(index)에서 상징(symbol)에 이르는 순차적 기호행위를 통해 재구성하였다.

불 꺼진 창고로 들어갔을 때 희미하게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누가 있습니까?’라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창고 한 구석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기 아무도 없어요...’

 
위에서 목소리의 주인공이 ‘저 혼자 있어요’라거나 ‘순이에요’라거나 혹은 ‘쿨록쿨록’하는 기침소리를 내더라도 똑같은 상황이 일어난다. 즉 누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여기 아무도 없어요’라는 문장은 단어의 뜻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문장의 발화 자체, 존재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 왜 그럴까? 그것은 어느 누가 어떤 말을 하거나 기침을 할 경우, 그 말과 기침은 전체 상황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체상황의 부분이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전체 상황을 표상할 경우를 퍼스는 지표(指標, index)의 기호작용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통증과 고통의 표정은 분리되지 않은 전체이지만, 고통의 표정을 분리하였을 경우 그것은 통증에 대한 지표로 기능한다. 흔히 징후(symptom)라고 부르는 것이다.

퍼스가 지표관계로 파악한 유명한 예는 풍향닭과 바람의 방향과의 관계다. 바람과 풍향닭을 전체로 파악하면 풍향닭은 바람의 방향의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바람의 방향과 풍향닭의 위치는 원인과 결과의 인과관계가 아니라 기호관계라는 점을 많은 철학자들이 오해하였다. 예를 들어 독일의 아펠(Karl-Otto Apel)과 이태리의 에코(Umberto Eco)가 퍼스를 잘못 이해하였다. 중요한 점은 지표관계에서 기호와 기호의 대상은 항상 순환적으로만 정의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전체로부터 부분을 분할할 경우 항상 순환적 관계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관계를 ‘내재적 관계’라고 불렀다.)

즉 풍향닭은 바람의 방향을 가리키고, 바람의 방향은 풍향닭이 가리키는 방향이다. 한 마디로 어떤 물건은 바람의 방향을 제대로 가리킬 때, 그리고 오로지 그러할 경우에만 풍향닭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정의를 풍향닭에 대한 기능적 정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내재적 관계의 특징인 필연성이 확보된다. 반면에 아펠과 에코는 풍향닭을 특정한 형태의 물건으로 파악하고 바람의 방향과 인과관계를 설정하였다. 이럴 경우에 물론 바람의 방향과 풍향닭 간에 필연적 관계는 사라진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감각기관을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는 부진근(扶塵根), 기능적 관점에서는 승의근(勝義根)이라고 불렀다. 승의근은 정확히 퍼스의 지표관계와 일치한다.)

지표의 도상
시공에 연장된 개체

 
이제 개체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일단 지표로 사용되는 이름이 필요하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 보자. 조용필 콘서트에서 가수 조용필이 등장하자, ‘조용필!’이라고 팬들이 외칠 때, ‘조용필!’이라는 외침은 일단 지표로서 콘서트장의 조용필-상황을 일으켰다. 그러나 콘서트장에서는 다른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가 보이지 않는 초등학생 조용필 팬이 있다면, 그는 옆의 언니에게 물어보았을 수도 있다. “누가 나왔어?”. 옆의 언니가 ‘조용필’이라고 대답했을 때, 언니는 동생이 ‘조용필’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이 이름을 통해서 동생이 과거에 경험했던 조용필-상황과 현재의 상황이 동일한 유형임을 말하고 있다. 즉 언니는 ‘조용필’을 도상으로서 사용하고 있다. 바로 그런 이유로 퍼스는 이 경우 ‘조용필’이라는 이름은 ‘지표의 도상’으로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이제 시공에 연장된 개체, 즉 개인으로서 조용필을 구성하는 마지막 단계를 살펴보자. ‘조용필’이라는 이름을 지표의 도상으로 사용하여 얻어진, 같은 유형에 속하는 수많은 조용필-상황들을 우리는 이른바 동치관계(equivalence relation)에 놓인 것으로 간주한다. 여기서 동치관계에 놓는다는 말은 특정한 측면에서 동일한 성질을 갖고 있는 대상들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정신적 행위를 말한다. 이른바 집합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흔히 집합추상(class abstraction)이라고 부른다. 이런 집합추상은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인이라는 대상은 구체적인 한국인들의 남녀노소, 직업, 고향 등을 막론하고 오로지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존재로 간주하였을 때에 생기는 추상적 존재다. 이 점은 우리가 구체적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인 그 자체를 데려올 수 없다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는 수많은 조용필-상황들에서 동치관계를 통해 얻어진 것은 무엇일까? 이 모든 조용필-상황에 공통적인 것은 바로 ‘조용필’이라고 불리는 존재로서 나머지는 바로 추상화를 통해서 모두 제거된다. 바로 시공에 연장된 개체, 개인으로서 조용필이 구성된 것이다. 동시에 ‘조용필’이라는 이름은 추상적 존재로 판명되고 재구성된 개체 조용필과는 완전히 독립적인 기호가 되었다. 퍼스는 이처럼 지칭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기호를 상징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언어, 즉 관습과 도입된 규칙에 의해 그 의미가 확정될 수 있는 기호는 사실 상징이며, 이 상징에 이르기 전의 과정을 우리는 망각하기 쉽다. 비유하자면 상징이란 이미 완전히 개체화(individuation)된 세계의 기호이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수면 아래에는 개체화 이전의 세계가 상징 이전의 기호와 엉켜 있다. 어쩌면 이 비유는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다. 기호가 도상인지 지표인지 아니면 상징인지는 그 외적 형태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기호의 사용방식에 따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우리가 기호를 어떻게 사용하고 그 사용방식이 갖는 의미를 철저히 성찰할 때 세계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의 존재 위치에 대한 생각 역시 바뀔 수 있다. 퍼스의 기호학이 갖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