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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 완성자 [생활속의철학]

by csr1974m 2025. 9. 14.

공리주의 완성자

영국은 서구의 어떤 나라보다도 일찍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겪었다. 그 결과, 영국은 다른 서구 제국보다 앞서 식민지 개척에 뛰어들 수 있었고, 19세기에 접어들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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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

출생 - 사망    1806.5.20. ~ 1873.5.7.

 
영국은 서구의 어떤 나라보다도 일찍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겪었다. 그 결과, 영국은 다른 서구 제국보다 앞서 식민지 개척에 뛰어들 수 있었고, 19세기에 접어들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세계의 패권국이 되었다. 역사가들은 19세기의 100여 년을 대영제국의 세기, 팍스 브리태니카(Pax-Britannica)의 시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무렵까지 영국은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유 시장경제 체제를를 토대하여 발전을 거듭하였지만, 산업혁명 이후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 산업자본가와 그들에 의한 자본의 억압 문제는 중요한 사회적 현안이 되었다. 19세기까지 영국은 국왕과 귀족, 그리고 시민이라는 세 계급의 타협으로 민주정치가 발전하였는데, 이로 인해 국가권력의 억압은 줄어들었지만,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한 자본이라는 새로운 억압 기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리주의는 이러한 자본의 억압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법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등장한 사회윤리학설이라고 할 수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벤담의 윤리학적 쾌락주의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군주의 지배 아래 두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를 지적하는 것도 오로지 이 두 군주에 달려 있다.”

이 유명한 구절은 공리주의의 창시자, 벤담(J. Bentham, 1748~1832)의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문]의 첫 문장이다. 벤담은 윤리의 토대를 기독교적 신성도, 칸트적 이성도 아닌 인간의 감성에서 찾았다. 그는 인간의 행위의 목적이 쾌락의 증대와 고통의 감소에 있다는 주장으로부터 그의 공리주의 이론을 전개한다. 즉 그는 어떤 행위가 윤리적으로 옳은 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행위자와 그 행위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쾌락을 최대한으로 증가시키고 고통을 최소한으로 감소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윤리학설의 기초가 되는 유용성의 원리(principle of utility)를 ‘모든 행위에 대해서, 그 행위가 관련된 사람의 행복(쾌락)을 증진하는 경향을 가졌는가, 감소하는 경향을 가졌는가에 따라서 그 행위를 시인하고 비난하는 원리’라고 정의한다. 어떤 행위가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가능한 한 최대의 행복을 초래하는 행위가 옳은 행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유명한 도덕원칙,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이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벤담은 인간의 행위가 쾌락의 증가와 고통의 감소를 목적으로 한다는 심리학적 쾌락주의를 근거로 하여, 쾌락을 증가시키고 고통을 감소시키는 행위가 윤리적으로 옳은 행위라는 윤리학적 쾌락주의를 추론하고 있는 것이다.

밀, 벤담을 계승하여
공리주의 윤리학설을 정립하다

 
밀(J. S. Mill, 1806~1873)도 심리학적 쾌락주의로부터 윤리학적 쾌락주의가 추론된다는 벤담의 입장을 수용한다. 효용과 최대 행복 원리가 도덕의 기초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행복이란 고통이 없는 상태이거나 쾌락이고, 효용도 쾌락에 다름 아니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밀도 벤담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밀은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은 행복이며, 그렇기 때문에 행복을 증진시키는 행위는 옳은 행위이고, 행복을 감소시키는 행위는 옳지 못한 행위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밀은 “쾌락과, 고통이 없는 상태야말로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유일한 것이며, 바람직한 모든 것은 그 자체에 들어 있는 쾌락 때문에 또는 고통을 막아주고 쾌락을 늘려주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벤담을 계승하여 공리주의 윤리학설을 정립한 밀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어떤 것이 바람직하다는 유일한 증거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바란다는 것이다.
2. 사람들이 실제로 바라는 것은 각자의 행복이다.
3. (1,2로부터) 각자의 행복은 각자에게 바람직한 것, 즉 각자에게 선이다.
4. (결론) 사회 전체에 바람직한 것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행복이다.

먼저 첫 번째 명제를 살펴보자.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바란다고 해서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 밀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본다(see)는 사실은 그것이 가시적(visible)임의 증거이고, 우리가 무엇인가를 듣는다(hear)는 사실은 그것이 가청적(audible)임의 증거이듯이, 우리가 무엇인가를 바란다(desire)는 사실이 곧 그것이 바람직한(desirable) 것임의 증거라고 말한다. 비록 어떤 것을 본다/듣는다는 사실이 그것이 가시적임/가청적임의 증거이지만, 우리가 어떤 것을 바란다고 해서, 그것이 곧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자주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바라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바란다는 무엇인가를 바란다는 사실로부터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타당하게 추론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것을 바란다는 것은 사실에 관한 명제이지만, 어떤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가치에 관한 명제이다. 이렇게 사실에 관한 명제로부터 가치에 관한 명제를 추론하는 잘못을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라고 한다. 심리학적 쾌락주의로부터 윤리학적 쾌락주의를 추론하는 벤담의 추론도 마찬가지로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행위가 쾌락의 증대와 고통의 감소를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로부터 “쾌락의 증대와 고통의 감소를 초래하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이다”는 주장을 추론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명제는 윤리학적 쾌락주의의 주장이지 공리주의의 주장이 아니다. 공리주의가 의미하는 행복은 단순히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사회적 관점에서 논의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번째 명제부터 네 번째 결론으로의 추론이 필요하다. 그런데 과연 사회 전체의 행복의 총량은 사회 구성원의 행복의 총량의 단순합일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합성(composition)의 오류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합성의 오류란 어떤 집단의 구성원 하나하나가 갖는 성질을 집단 자체가 갖는다고 추론하는 오류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각각 존경하는 사람을 갖는다는 사실로부터 그 사회 전체가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고 추론하는 오류이다. 이 추론이 합성의 오류를 범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구성원 개인의 행복의 총합이 곧 사회 전체의 행복의 총량이라고 할 수 없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밀은 세 번째 명제로부터 네 번째 결론으로의 추론을 어떻게 정당화하는가? 밀은 이에 대해서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답한다. 인간은 그 천성에 있어서 사회적 존재이고, 인간의 사회성은 인류가 야만의 상태로부터 멀어져 갈수록 점점 강화되는데, 인간의 사회성은 서로 협조하고 모든 사람의 이익을 존중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 밀은 이로부터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은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밀은 ‘공리주의의 도덕성은 다른 사람들의 선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최대 선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다고 인정’한다. 요컨대 인간은 사회성을 자연스러운 특징으로 갖기 때문에 상호 협력할 수 있는 존재이고, 인간의 양심이 모든 사람의 이익을 존중하도록 요구한다는 사실에 호소해서 공리주의 윤리학설을 정당화한다.

쾌락의 양에 주목한 벤담
쾌락의 질적 차이에 주목한 밀

 
여기까지는 밀의 주장과 벤담의 주장에는 별 차이가 없다. 밀과 벤담이 분명하게 구별 되는 중요한 대목은 바로 쾌락의 질적 차이에 대한 논의이다. 그리스 시대 이래로 쾌락이 인생에서 가장 추구할 만한 것이라고 주장해 온 쾌락주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비판은 인간을 돼지와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은 쾌락보다 훨씬 고상한 무엇인데, 쾌락주의는 인간의 고귀함을 망각하고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돼지와 같은 존재로 전락시키는 천박한 이론이라는 것이다. 도덕적 가치의 기준을 오직 쾌락의 양에 있다고 본 벤담과 달리 밀은 쾌락에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쾌락주의에 대한 전통적인 비판에 답한다. 돼지가 추구하는 쾌락보다 귀하고 고상한 쾌락이 없다면 쾌락주의에 대한 전통적인 비판은 뼈아픈 비판이 될 수 있겠지만, 인간이 추구하고, 추구해야 할 쾌락이 돼지가 추구하는 쾌락과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면, 쾌락주의가 인간의 고귀함을 무시한 천박한 이론이라고 비판은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밀은 오히려 인간이 추구하는 쾌락을 돼지의 쾌락과 동일시하는 쾌락주의 비판가들이야말로 인간의 고귀함을 망각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비판한다. 어떤 종류의 쾌락은 다른 종류의 쾌락보다 더 바람직하고 가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최대 다수 최대 행복’을 모토로 삼은 벤담의 공리주의를 양적 공리주의라고 부르는 한편, 밀의 공리주의를 질적 공리주의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어떤 쾌락은 고급의 쾌락이고 어떤 쾌락은 저급한 것인가? 이에 대해서 밀은 “두 가지 쾌락에 대해서, 그 두 가지를 모두 경험한 모든 사람 또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그 선택된 것이 보다 바람직한 쾌락”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만약 두 가지 쾌락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어떤 하나의 쾌락이 다른 쾌락에 비하여 항상 그 양이 적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쾌락을 선택한다면 바로 그 쾌락이 더 값진 쾌락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밀이 ‘행복과 만족’을 구분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만족이 곧 행복은 아니다. 고귀한 즐거움을 향유하는 능력이 낮은 존재일수록 쉽게 만족을 느끼지만,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고귀함을 지닌 존재는 동물의 쾌락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높은 가치의 쾌락을 추구할 것이다. 그래서 밀은 “만족해하는 돼지보다 불만족해 하는 사람이 낫고, 만족해하는 바보보다 불만족해 하는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고 말한다. 밀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고귀함을 버리고 돼지가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행위의 도덕적 평가의 기준을 그 행위가 초래하는 효용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공리주의는 결과주의(consequentialism) 윤리학설이다. 어떤 행위가 도덕적인가 아닌가의 기준을 그 행위의 동기에서 찾은 칸트(I. Kant)와 달리 밀은 행위의 도덕적 평가기준은 결과에 있다고 주장한다. 밀은 우리 인간이 사회 전체 구성원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행복을 희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그러한 희생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행복의 총량을 증대시키지 않거나 그럴 경향이 없는 희생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전적으로 결과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행위에 대하여 우리가 윤리적 판단을 할 때, 일반적으로 그 행위의 동기에 대해서도 고려하는 것 같다. 어떤 행위가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고 해도 그 행위가 좋은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나쁜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비난을 하지 않거나, 설령 비난을 하거나 제재를 할 경우에도 정상을 참작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직관이다. 그런 점에서 어떤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오직 그 행위의 결과로만 한정하는 공리주의는 직관적이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 밀은 행위의 동기는 사람의 품성을 판별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 뿐, 행위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데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밀은 “자신의 행복과 다른 사람의 행복 둘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이라면, 공리주의는 그 사람에게 사심 없는 선의의 구경꾼만큼이나 엄격하게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 도덕의 황금률에서 공리주의의 정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성에 대한 끝없는 신뢰 
밀의 낙관주의적 태도

 
밀의 공리주의에 대한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읽을 수 있는 분명한 사실 하나는, 밀이 인간성에 대하여 끝없이 신뢰하는 낙관주의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밀은 인간의 사회성을 서로 협조하고 타인의 이익을 존중하는 경향으로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두 개의 질적으로 다른 쾌락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질적으로 고귀한 쾌락을 선호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을 생각해 보라. 누구나 질적으로 고귀한 쾌락을 선호할 것이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밀은 인간은 모름지기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의 인간에 대한 믿음은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심지어 소박하기 조차하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의 철학의 큰 약점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밀은 도덕적 능력이 내재적인 본성은 아닐지라도 인간의 본성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따라서 인간이 좋은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물론 인간이 모두 도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밀은 공리주의 원리에 법과 사회제도에 관한 견해와 교육에 대한 견해가 포함되어야 함을 지적한다. 즉 그는 공리주의는 “모든 개인의 행복 또는 이익이 전체의 이익과 가능하면 최대한 조화를 이루도록 법과 사회제도를 만들어야” 하고, 교육을 통해서 “모든 개인이 자신의 행복과 전체의 이익 사이에 서로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음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밀은 교육과 법, 사회제도를 통해서 도덕적으로 성숙한 인간 사회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냉철한 이성을 소유한 주지주의자
따뜻한 가슴을 지닌 휴머니스트, 밀

 
필자는 밀의 이러한 모습을 그가 따뜻한 가슴을 지닌 휴머니스트이기 때문이라고 읽는다. 밀의 이러한 면모는 그의 해리엇 테일러(Harriet Taylor)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밀이 스물네 살이 된 1830년, 그는 이미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는 해리엇을 처음 만난다. 그 이후 20년 동안 순수한 지적인 교제를 계속한다. 그들의 교제는 당시 세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이성적인 행동으로 해서 추문에 이르지 않았고, 해리엇의 남편인 존 테일러도 그들의 관계를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1849년 테일러 부인의 남편이 죽자, 밀은 열렬한 구애 끝에 마침내 1851년 테일러 부인과 결혼을 한다. 밀은 기존의 결혼 관계에 존재하는 남성 중심적인 가치를 거부하면서, 새로운 결혼관계를 규정하는 감동적인 결혼 서약서를 남긴다. 그러나 훗날 밀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행복하고 감격스러운 시기라고 술회한 결혼기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해리엇이 밀과의 프랑스 여행 중에 패혈증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 때가 1858년이었으니, 그의 결혼 생활은 7년 남짓이 전부였다. 밀은 해리엇의 사망으로 비탄에 빠져서 건강마저 악화된다. 그러나 슬픔을 딛고 일어난 밀은 그 이듬해, 그의 저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자유론]을 발표하고, 그것이 해리엇과의 공저임을 밝힌다. 1869년 여성 해방운동의 성경이라고 할 만한 [여성의 종속]을 발표하여, 그의 진보적인 사상의 일단을 보여준다.

냉철한 이성을 소유한 주지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열정적인 가슴을 지닌 낭만주의자 밀은 1873년 “나는 내 일을 다 끝마쳤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었다. 밀은 “자신보다 뛰어난 사상가요, 자신의 삶의 영광이며 최고의 축복”이라고 찬양했던 자신의 유일한 여자, 해리엇의 곁에 묻혔다.